[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기존 하는 일을 다르게 정의하니 반전이 일어난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기존 하는 일을 다르게 정의하니 반전이 일어난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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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광고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93년 주요 광고주였던 모 식품회사에서 색다른 임무를 주었다. 자신들이 새로운 음료를 개발하고 있는데, 그 조사 과정에 광고회사에서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같이 조사하던 일도 많고 해서, 우리 팀에서 참여하게 되었다. 2~3주 간격을 두고 광고주 마케팅팀의 담당자가 연구소에서 만들었다는 음료를 시험용으로 가지고 왔다. 그럼 그걸 맛보고 평하고 무엇을 더했으면 좋을지 등의 의견을 제시하는 게 우리 일이었다. 그 의견이 얼마큼 영향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따로 조사도 하고 싶었으나, 신제품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며 극도로 보안을 걸어서 할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들 자신이 소비자를 대변한다고 했지만, 일반 조사 대상자와 별다를 바 없었다. 우리도 그렇지만, 음료 회사 측에서도 조금 더 과감한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공헌했는지는 몰라도 그 음료 제품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며 나와서 지금까지도 꽤 잘 판매되고 있다.

수동적으로 실험 제품의 맛만 평가했던 우리 팀과는 다르게 보다 적극적으로 광고회사에서 개입한 경우가 제법 있다. 1990년에 어느 화장품 회사의 광고를 담당했던 카피라이터가 다른 경쟁자와 차별된 보습제의 혜택을 생각하다가, ‘당신의 피부를 촉촉하게 만드는 작은 산소 방울들’이란 표현과 함께 ‘oxygenating moisturizer’라고 자기가 맡은 제품을 명명했다. 기존 보습제에서 달라진 부분은 없으나, ‘산소’라는 단어가 주는 신선한 느낌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 화장품 회사에서는 연구개발 부서에 그 카피에 맞는 제품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보통 제품이 완성된 후에 기능과 사양 정보에 따라 광고를 만드는 것과 달리 광고 카피가 신제품의 개발을 유도한 반전의 사례가 되었다. 비슷한 경우는 식품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KFC가 오리지널에 이어 문자 그대로 더욱 바삭하게 만든 ‘엑스트라 크리스피’ 제품 라인을 출시했다. 오리지널과 같은 가격으로 내놓았는데, 소비자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광고회사에서 엑스트라 크리스피는 오리지널보다 더욱 고급 제품으로 포지셔닝 하는 것도 가능하다면서 가격을 인상하도록 설득했다. 긴가민가하면서 KFC에서 가격을 인상했는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매출이 쑥쑥 올랐다.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의 하나로 가격이 더 맛있는 고급 제품으로서의 이미지를 전달한 것이다. 광고가 단순히 마케팅 4P로 치면 ‘프로모션’에만 국한된 게 아니고,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게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이다.

일본의 가전업체인 소니(Sony)가 워크맨이라는 휴대용 오디오기기를 세상에 내놓고 새로운 제품 카테고리의 장을 연 건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최대의 가전업체로 파나소닉이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마쓰시다에서도 비슷한 콘셉트의 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쓰시다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주도하면서 없앨 부분은 없애고, 줄일 수 있는 건 줄이면서 최소한의 크기의 제품을 만들어냈다. 소니의 접근 방식은 달랐다. 사람이 가지고 다니면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오디오 기기의 크기를 먼저 규정하고, 엔지니어들에게 그만한 크기의 제품을 만들어내라고 했단다. 이런 제품 개발에서의 역할 반전이 일어나는 유명한 곳이 바로 애플이다.

아마존과 페이스북, 구글에서는 엔지니어가 귀족 대우를 받지만, 애플에서는 디자이너가 신성한 존재로 추앙받는다. 일반적으로 기업에 소속된 디자이너는 제품을 건네받고 그것을 보기 좋게 만들라는 주문을 받는다. 반면 애플 디자이너는 제품의 외형과 느낌에 대해 지시를 내린다. 이에 따라 엔지니어와 프로덕트 매니저는 기술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구현하는 책임을 맡는다.

<올웨이스 데이원>(알렉스 칸트로위츠 지음, 박세연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펴냄, 2021) 213쪽

기존의 정의, 아니면 스스로 정한 굴레 안에 자신을 제한하지 말라. 역사도, 기술도, 제품이나 서비스의 개발도 이제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차례와 역할을 바꿔보면 거기서 혁명이, 혁신이 그리고 반전이 일어난다.

 


박재항 한림대학교 초빙교수, 대학내일 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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