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프레젠테이션을 여는 살짝 반전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프레젠테이션을 여는 살짝 반전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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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픽사베이
출처 픽사베이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강연이나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처음을 무엇으로 꺼내느냐가 가장 신경 쓰인다. 첫 단추만 잘 끼워지면 다음은 거의 자동으로 나아간다. 30대 초의 나이로 최고의 광고대행사였던 맥캔에릭슨의 2인자 지위에까지 올랐던 전설적 인물인 한국계 미국 광고인이었던 피터 김(Peter Kim)이 1997년에 삼성 사장단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할 때 대충 아래와 같이 얘기하면서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대개 농담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합니다. 저는 농담을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의 프레젠테이션은 농담 없이 시작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농담입니다.(Americans often begin their own presentations with jokes. I seldom tell a joke. So, there's no joke for the presentation today. That's the joke of the day.)"

유감스럽기도 하고 당연하게도 그 농담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삼성 사장단 인사들에게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원래 온화한 분위기도 아닌 사장단 회의 공기가 더욱 싸해졌다. 그런 분위기에 주눅 들지 않고 그는 자신의 팀원들이 열심히 자료를 보고 밤을 새우며 일을 했다며 역설을 했다. 심지어는 한국어까지 배웠음을 강조하며 갑자기 스태프 중에 브래들리 피칵(Bradley Peacock)이란 친구를 일으켜 세워 한국말로 자기소개를 시켰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역력한 피칵이 겨우 그가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어 표현을 짜냈다. “저는 브래들리 피칵입니다.” 그 한 문장으로 그래도 변화가 일어났다. 브랜들리 피칵은 느닷없이 호출되어 기겁했지만, 효과는 충분히 있었다. 사장들 몇몇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미소를 띠었다가 누가 볼세라 감추었지만, 분위기는 충분히 반전되었다. 10년 후쯤 만난 브래들리 피칵은 그때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당황했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보통 나도 그날에 맞춘 농담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꼭 농담이 아니더라도 듣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대상을 가져다가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곤 한다. 선배 하나가 ‘아가방’이란 회사에 가서 “10년 전에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때의 작은 회사가 이렇게 한국의 아기들을 키워내는 대표 회사로 성장했습니다”라고 얘기했을 때 아가방 직원들이 짓던 감개 어린 표정을 기억한다.

2010년대 초에 강남 서초동 반포IC 앞의 KCC 본사에 가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 건너편에 내가 ‘88년부터 단골집처럼 다니는 ’88민물장어‘란 상호의 음식점이 있었다. 그날 프레젠테이션할 주제가 기업광고였다. 시작하면서 내가 88민물장어 음식점을 20년 넘게 다닌 오랜 단골이란 사실을 얘기했다. 근엄한 임원들 몇이 ’헛헛‘ 웃으며 약간 표정이 풀렸다. “그런데 제가 88민물장어의 위치를 설명할 때, 보통 제일생명 사거리에서 반포 쪽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강남 교보 사거리에서 반포 쪽으로 오라고 얘기합니다.” 자신들도 잘 다니는 창밖으로 보이는 장어집 이야기를 왜 불쑥 꺼내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 여러 사람들 얼굴에 드러났다. 그때 “오늘 말씀드릴 기업광고를 통하여 사람들이 88민물장어 위치를 설명할 때 ’KCC' 건너편이라고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덧붙이며 본격 프레젠테이션으로 들어갔다. 프레젠테이션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2000년대 중반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을 때, 원로 기술인들의 조찬모임에 가서 마케팅 관련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연 사회를 맡은 그 모임의 좌장이 나의 경력 소개를 위한 이력 자료를 하나씩 짚으며 확인을 하다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소리를 높여 물어봤다. “아니, 동양사학과를 나오셨군요! 어떻게 가능하죠?” 한국에서 학부의 전공에 따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겠는가를 얼추 추측하매, 그분께서 심하게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공과대학교 출신자들의 경우 공업 분야에서 계속 일하는 비율이 다른 부문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높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다.

사실 이런 식의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 편이었다. 특히 컨설팅이나 자문을 위하여 최고 경영층을 만났을 때, 일종의 비공식적인 테스트와도 같은 형식으로 학부의 전공 관련한 질문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이 당시에는 준비해 놓은 대답이 있었다. “HP, 곧 휴렛팩커드(Hewlett Packard)의 CEO였던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가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아, 그래요?!” 이 대답 하나로 전공 관련하여 나에 대한 그분의 의구심(?)은 사라졌다. 그들 공학도 출신 경영자들이 HP를 최고의 기업으로 거의 추앙하다시피 하던 시절이었고, 칼리 피오리나가 그 HP의 최고경영자로 전성기를 누릴 때였다.

사회자분이 처음에 기업 경영이나 마케팅과는 동떨어졌다고 생각한 나의 전공이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되는 반전이 일어났다. 공식적으로 나를 소개하는 한 대목에서 옅은 미소를 띠었지만, 힘을 주어 사회자가 말했다. “박재항 소장님은 동양사학과를 나오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너무나도 잘 아시는 칼리 피오리나가 박 소장님과 같은 역사를 전공했다고 합니다.” 면접관처럼 안경 너머 꼬장꼬장한 눈빛을 보내시던 참석하신 분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그날의 강연은 매우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격려성 질문들까지 이어지면서 끝났다.

졸저 <반전의 품격> 책의 영문 제목을 정하는데, ‘반전’을 ‘twist’라고 옮겼다. ‘reverse’, ‘turn-over’ 같은 완전히 거꾸로 돌리는 것보다 살짝 비틀거나 양념식으로 가미하는 게 더 큰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특히 약간의 자기선전이 필요한 프레젠테이션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박재항 한림대학교 초빙교수, 대학내일 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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