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전쟁과 굶주림을 이긴 반전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전쟁과 굶주림을 이긴 반전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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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nsplash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기어코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와 전쟁이 결부되어 내게 일으키는 제1연상은 2차대전 중 900일의 포위를 견디어 낸 한 도시이다. 그 도시가 포위되었던 나날들과 비슷하게 900쪽이 넘게 그 전투 하나만을 다룬 책을 읽었다. 그리고 여러 책에서 그 도시에서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투 중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농학자들의 눈물겨운 일화도 그중의 하나였다.

"연구원들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철에 스스로를 감금한 채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24시간 종자를 보살폈다. 바빌로프의 헌신적인 동료들 중 아홉 명이 병으로 죽거나 굶어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 <식탁 위의 세상>(켈시 티머먼 지음, 문희경 옮김, 부키 펴냄, 2016) 216쪽

잘 알려진 것처럼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소련을 침공한다. 주공격 목표 중의 하나가 예전의 러시아 수도였던 상뻬쩨르부르크, 당시는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던 도시였다. 그해 9월 독일군은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다. 고립되어 지원 물자를 받지 못한 레닌그라드에서는 아사자, 동사자, 병사자가 속출했다. 특히 굶주림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 가운데 바빌로프 식물산업연구소의 러시아 과학자 12명이 목숨을 걸고 종자와 작물을 지킨 사실을 묘사한 대목이다. 인터넷 어느 문서에는 약간 다르게 아래와 같이 나와 있었다.

소련 최대의 농업 작물 종자와 표본을 보존하고 있던 파블롭스크 실험국에서는 소련 농업의 미래를 위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종자와 표본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과학자들이 피난을 거부하고 자리를 지키다가 자신의 종자들에 차마 손대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독일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희생으로 소련 농업은 전후 가까스로 회생할 수 있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실험국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 한자로는 '농부아사 침궐종자(農夫餓死 枕厥種子)'라고 하는 옛말이 생각났다. 굶어 죽을지언정 다음 농사를 준비한다, 곧 후손과 미래를 위해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렇게 글로 이 말을 대하기보다 먼저 나는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이 속담을 처음 알았다.

"어느 농부가 굶어 죽었는데, 천장에 종자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대. 그 종자란 것이 씨앗이니까 먹을 수 있거든. 그걸 먹으면 살았지."

어떤 계제로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몰렸어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위를 잘 살펴보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는 뜻으로 하셨던 것 같다. 농부의 행위도 어리석음보다는 고집스러움과 고지식함에 무게가 두셨다.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식은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쓰신 의미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면 위의 책에 나온 과학자들과 맞닿아 있다. 종자를 지켰던 과학자 중 살아남은 이가 훗날에 어느 인터뷰에서 종자를 먹지 않고 버티는 게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단다.

"우리는 걸을 힘도 없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손발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죠. ... 하지만 종자를 먹지 않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걸 먹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죠. 종자에는 내 삶의 이유, 우리 동지들의 삶의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요."

이 과학자의 말에는 후손을 위한 준비와 같은 거창한 뜻이 직접적으로 담겨 있지는 않다. 자신의 존재 이유와 연대의 상징물로서의 의미가 먼저이다. 종자를 먹는다는 게 바로 자신의 혼을 죽이고, 동료들까지도 살해하는 행위가 된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라는 말과 2차대전 때 소련 농학자들의 활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람에 따라 약간씩 차이 날 수 있다. 그래도 정리하자면 다음의 세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다.

  • 어떤 경우에도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 위기 대처를 위한 세심함과 융통성을 지녀야 한다.
  • 자신의 존재 이유에 충실해야 한다.

절대로 틀리고 맞고는 없다. 어떤 구절이든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있다.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전세를 굶주림 속에서도 이겨내며 2차대전 승전의 전기를 마련했던 러시아가 자신만이 옳다면서 역사를 거스르는 반전을 일으키고 있다. 안타깝다.

 


박재항 한림대학교 초빙교수, 대학내일 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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