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고백에서 디지털 - 624년 만에 밝혀진 인류의 비밀: "직지(直指)", 그리고 한국 광고의 역사

[신인섭 칼럼] 고백에서 디지털 - 624년 만에 밝혀진 인류의 비밀: "직지(直指)", 그리고 한국 광고의 역사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2.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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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지난 7월에 청주시 흥덕사가 있는 곳의 <고인쇄(古印刷) 박물관>에서 연락이 왔다. 10월 중순에 우리나라 광고의 역사와 관련된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어서 도움을 요청한다기에 그러기로 했다. 언뜻 응낙은 했으나, 그 이유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여기저기 자료를 찾았다. 그리고 이 전시회는 흥미로우면서도 앞날을 시사하는 행사가 될 수도 있겠다고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흥덕사는 지금으로부터 644년 전인 1377년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직지(直指)> 불경이 인쇄된 곳이다. 그런데 청주 고인쇄 박물관 그리고 <직지>란 금속 활자는 우리에게 그리 낯익은 이름이 아니다. 흔히 인쇄의 시작은 독일 구텐베르크가 1455년 금속활자로 인쇄한 42자 성경이라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하기야 나무랄 것도 없을는지 모른다. 유네스코(UNESCO)에서 공식으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고 발표한 것이 2001년 즉 겨우 20년 전이었으니까. 달리 보면 직지심체요절이란 불교 서적을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을 유네스코에서 공인한 것은 2001년이니 624년 지나고 나서야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실(史實)은 고려 말 1377년에 고승 백운화상(白雲和尙)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전에 출판했다. 그 해(2001)에 유네스코는 직지를 세계기록 유산 (Memory of The World Register)로 등재했다. 말하자면 <직지> 책 출판 624년 후에 이런 사실을 세계가 공인한 것이다. 잘못은 이런 사실을 600여 년 동안 모르고 있던 우리에게 있었다. 매우 다행한 것은 이런 사실을 밝혀낸 분이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란 말이 나온다.

직지 (출처 세계기록유산관)

<직지(直指)>란? 흔히는 줄인 말 <직지>라 부르지만, 제대로 쓰면 <백운화상 초록 불조 직지 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된다.

간단히 풀이하자면, 쓰신 분의 이름은 <백운(白雲)>이니 흰 구름이요 오랫동안 도를 닦은 스님이므로 백운화상(白雲和尙)>이라 부른다. 초록이란 필요한 대목만을 간추린 글이라 뜻이며 <불조직지심체>는 불도를 깊이 닦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뜻이라 한다. 인도와 중국의 승려 145명의 글 가운데 골라서 모은 책이므로 초록이라 했는데 독실한 비구니 <묘적>이란 분의 도움으로 출판한 책이다.

이 소중한 책은 상하권 두 권으로 인쇄되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하권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지 않고 국립 프랑스 도서관 동양 도서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이유는 19세기 말 한국이 개항한 뒤 프랑스 대사관의 공사로 있던 콜린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가 한국에서 귀국할 때에 가지고 간 수집품 가운데 들어 있던 <직지>는 그 뒤 고서적 판매상의 손을 거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고 박병선 박사 (출처 중앙일보 네이버포스트)
고 박병선 박사 (출처 중앙일보 네이버포스트)

눈물겨운 재외 한국 여성 박병선(朴炳善) 박사 필생의 노력 624년 만에 유네스코의 공식 발표로 <직지>가 제자리를 찾기까지에는 한평생을 우리 것 찾기에 바친 재외 한국 여성 학자 박병선 박사의 눈물겹고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박병선은 1955년 서울대학 사범대학을 나와 프랑스로 유학길을 떠났다. 박병선은 대학 은사 이병도(李丙燾) 교수의 부탁을 잊지 않고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外奎章閣儀軌)의 행방을 찾아보라는 말씀이었다. 부지런히 도서관을 드나드는 박병선을 눈여겨보던 도서관 측은 1967년 그를 사서로 채용했는데, 박병선이 의궤 찾기 5년 만에 발견한 것은 의궤가 아니라 <직지심체요절>이었다. 직지심체요절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2는 프랑스 도서관이 주최한 <이 해의 국제 도서전>이었고 비로소 수년에 걸친 박병선의 노력이 빛을 보았다.

다시 3년 뒤 베르사유 궁전 분관 창고의 고서 뭉치에서 의궤(儀軌)를 찾은 뒤 한국으로 <영구 대여>된 것은 또 다른 30년이 흐른 2011년이었다.

출처 네이버 포스트 (김휴림의 엽서)
고인쇄박물관 (출처 네이버 포스트, 김휴림의 엽서)

그러다가 금속 글자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특히 광고와 어떤 관계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나라이든 광고의 시작은 글이었다. 세계 광고의 효시라는 이집트의 <로제타의 돌>(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도 상형문자, 민용 문자 그리고 그리스어의 3개 글이다. 중국이 국보처럼 자랑하는 북송 시대(960-1127)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 속에 수두룩한 간판에는 모두 글자가 있다. 일본의 오랜 광고는 히끼후다(引札) 혹은 노렌(暖簾)인데 역시 글자와 그림이다.

지금은 소리, 그림, 동영상이 더욱 중요해진 것은 사실이나 글이 없는 광고란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광고는 글을 가장 자주 널리 많이 전파하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은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책이지 광고 책은 아니다. 다만 이 책에 쓰인 글의 목적이 부처님 말씀을 널리 꾸준히 알리고자 하는 것 즉 광(廣)하게 고(告)하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교이든 정치이든 문화이든 무슨 일이든지 알리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디지털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다.

한국의 신문이 매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한 것은 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 박사가 한글로 독립신문을 창간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 창간호 1면 첫 글의 제목은 <광고>이다.

이 광고란을 통해 서재필 박사는 독립신문 창간의 목적을 알렸다. 그리고 구독료를 알렸는데 길가에서 파는 경우는 열 장을 여덟 장 값을 내고 사다가 팔라는 것을 광고했다. 백운화상 스님이 금속활자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었다면 그보다 519년 뒤 서재필 박사는 역시 금속활자로 인쇄한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한쪽은 한문이었고 또 한쪽은 한글이었다. 서재필 박사가 직지를 알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둘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훌륭한 목적을 위해 집요하게 창의력을 발휘한 것이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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