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급변하는 한양(서울) 거리

[신인섭 칼럼] 급변하는 한양(서울) 거리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2.09.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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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한일합방이 된 지도 석 달이 지난 1910년 11월 29일 조선총독부 국문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신문지 크기의 광고 부록이 실렸다. 헌병 정치라 부르던 시절, 조선말 신문이라고는 매일신보뿐이었는데, 광고는 계속되었다. 이 신문 광고 특집에는 18개 광고주의 광고가 실린 “부록”이 있었다. 유일한 사진관 광고는 일본인 광고주였다. 윗줄 우측으로부터 차례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1910년 11월 29일자 매일신보 광고 부록
1910년 11월 29일자 매일신보 광고 부록

※ 1910년 11월 29일 매일신보 광고 전단의 광고주 (우측 위부터) : 18개 상점

  1. 동흥서관
  2. 성인당. 약국
  3. 한양서시(書市). 책, 지물, 서화, 학교용품
  4. 청심보명단. 대형 신사복 차림. 약
  5. 윤흥은포
  6. 상흥 양복
  7. 한성서화
  8. 중앙서관. 통신판매
  9. 항흥상회. 연초 제조, 석판 인쇄
  10. 목욕탕, 이발관
  11. 사진관 (일본인)
  12. 공화당. 건재, 약국
  13. 양화점
  14. 시계 상점
  15. 영흥 동서양 잡품
  16. 광흥 상점. 안경
  17. 광신상회. 양화
  18. 천도교 상점

※ 18개 광고주 업종별 수 

  • 서점 5
  • 약국/방 3
  • 양복/양화 3
  • 은방 1
  • 목욕/이발 1
  • 사진관(일본인) 1
  • 시계 1
  • 안경 1
  • 기타 2

110년 전 개항과 개화의 소용돌이 속 한양의 시가 풍경의 압축이랄까. 아마 개회기 초 최대의 광고주는 외국 지리, 역사, 과학, 기술 그리고 일본어 영어 교육 따위 책과 강의 안내 광고였다.

그래서 서점 광고가 다섯 개나 된다. 약국과 약방이 셋이고, 개화파 신사의 상징인 양복과 양화 상점 광고가 역시 셋이다. 목욕탕과 이발은 역시 개화기 신사의 상징이었다. 일본인의 사진관 광고가 있는데, 아마 조선인 고객을 생각한 탓이리라. 시계는 역시 개화의 상징이었는데 손목시계는 시기상조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회중시계는 지위의 표시였을 것이다. 신사복 조끼에 멋진 줄이 보이게 넣고 다니는 회중시계였다. 안경은 오랜 제품이지만, 개화의 물결을 탔을 것이다.

광고주의 업종 구분 8개(기타 제외)를 보면 약국과 은방을 제외하면, 개화의 산물이 6개나 되니 “양품“이 지배하는 한양으로 바뀌었다. 조금 더 사진이 발달했으면 거리 풍경이 남아 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부록 광고를 자세히 보면 맨 위 오른쪽 손가락 가리키는 위치에 “발기자 한성광고사(發起者 漢城廣告舍)”라고 쓴 것이 보인다. 즉 이 부록의 18개 광고주를 모집해 매일신보 부록으로 게재한 회사의 이름이다. “광고사”의 “사” 자가 회사라는 말의 “사(社)”가 아니고 기숙사 따위 말에 사용하는 집이라는 뜻의 사(舍)“로 되어 있다. 한성광고사는 틀림없이 한국인이 경영하는 광고대행사였다.

한일합방 전 대한매일신보이던 시절에 신문 광고를 게재한 것이 남아 있는데, 신문잡지 광고 대행을 하다가 차차 금고, 유성기, 회사 책권 따위 판매로 업종이 바뀐다. 아마도 합방과 함께 총독부 조선어 기관지 하나를 빼고는 조선어 신문 잡지는 자취를 감추게 되자 업종을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나라 잃은 설음은 광고대행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나 할까. 한편 1906년 을사늑약 체결 1년 뒤에 통신과 광고 대행을 겸하는 일본전보통신사(日本電報通信社)는 날개를 펴게 되었을 것이다.

이 부록 광고 18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광고주는 경성부 남대문로에 있는 제생당대약방(濟生堂大藥房)인데, 대표 제품은 “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이었다. 청심보명단은 밀려오는 일본 제품과 경쟁하는 제품이었다.

남문로에 있던 제생당의 청심보명단 퍼레이드.  “초창기의 약 광고. 복과 꽹가리를 치고 깃발 행렬이 뒤따르면 거리는 이를 구경하려는 인파로 메워진다”라는 캡션이 있다.
남문로에 있던 제생당의 청심보명단 퍼레이드. “초창기의 약 광고. 복과 꽹가리를 치고 깃발 행렬이 뒤따르면 거리는 이를 구경하려는 인파로 메워진다”라는 캡션이 있다.

개화기에 한국인 경영 광고회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광고 전문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10년 11월 29일 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전단 같은 부록이 그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한성광고사가 발기인이 된 광고는 하나 더 있다.

910년 7월 7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한성광고사의 자사 광고. 확대한 광고에는 “제신문잡지 광고 취급”이라는 글이 있다. 합방 다음 해인 1911년 6월과 7월의 세 광고에는 한성광고사의 업종 변경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 있는데 철제 금고, 留聲機(유성기), 은행회사 증권 판매가 광고에 나와 있다.
910년 7월 7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한성광고사의 자사 광고. 확대한 광고에는 “제신문잡지 광고 취급”이라는 글이 있다. 합방 다음 해인 1911년 6월과 7월의 세 광고에는 한성광고사의 업종 변경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 있는데 철제 금고, 留聲機(유성기), 은행회사 증권 판매가 광고에 나와 있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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