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트럼프가 야기한 미국인의 청력 테스트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트럼프가 야기한 미국인의 청력 테스트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10.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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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출처 history.com)
트럼프 (출처 history.com)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간단한 영어 문제를 내보겠다. 아래 문장들의 괄호 빈칸을 채우려 한다. ‘bigly’와 ‘big league’ 중 어느 쪽이 더 적합할까? 혹은 다른 방식이 좋을까?

- We are going to win ( ).

- That’s what happened ( ).

- They’re taking it over ( ).

① bigly

② big league

③ ‘bigly’나 ‘big league’나 둘 다 쓰일 수 있다.

④ 둘 다 쓰일 수 없다.

‘big’이란 단어가 접미사 격의 ‘ly’ 앞에 붙거나, ‘league’를 수식하며 쓰여 대충 무슨 뜻인지는 감을 잡을 수 있다. ‘우리가 크게 이길 것이다’, ‘그렇게 심각하게 일이 벌어졌다’, ‘압도적으로 차지해버렸다’라는 정도이겠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영어 문법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big league’는 미국 프로 야구로 치면 마이너리그와 대비되는 최고의 메이저리그, 유럽 축구에서라면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독일의 분데스리가, 스페인의 라리가, 이태리의 세리에 같은 최고, 최대 등급의 스포츠 리그를 가리킨다. 명사 형태인데, 그걸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로 썼다. 불편하다. 더더욱 요상한 건 ‘bigly’였다. 영어 원어민들에게도 그 단어는 이상했다.

위의 예문 세 개는 모두 한 인물이 대중들에게 하는 말 중에서 뱉은 문장이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인 트럼프가 위의 말을 한 주인공인데, 두 번째 것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2016년 9월 26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 전국에 생중계되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트럼프가 오바마의 이민정책을 비판하면서 말했는데, 내용보다 트럼프가 ‘bigly’란 이상한 단어를 썼다는 사실이 화제로 떠올랐다. 그런 단어가 대체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자기 맘대로 만들어 어법에도 맞지 않게 사용했다고 트럼프의 무식함을 비판하는 SNS 포스팅이 줄을 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주류 언론 매체에서도 기가 막힌다는 반응의 기사들이 나왔다.

실제 존재하는 단어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영국 옥스퍼드사전을 편찬하는 인사 중 하나가 ‘bigly’가 ‘강력하게’, ‘압도적으로’ 등의 뜻을 지닌 부사로 존재하기는 하나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미국의 대표 사전인 메리엄-웹스터 사전 담당자도 비슷하게 답하며,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존재하는 단어라고 확인해 줬다. 언어학자라는 이가 트럼프의 음성과 음향 등을 기계로 분석하는, 이제는 우리에게도 본의 아니게 익숙해진 음성분석 프로그램을 돌리고, 주파수를 따져서 잘 들리지는 않지만, 끝에 ‘g’ 소리가 나온다며, ‘big league’로 한 것 같다고 했다. 트럼프의 아들도 자기 아버지는 ‘big league’라고 말했다며 언어학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트럼프는 2015년에도 ‘bigly’와 ‘big league’ 중 어느 편을 사용했느냐는 문제로 구설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트럼프 선거본부의 대변인을 맡고 있던 이가 ‘big league’가 맞고, 그편을 즐겨 쓴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름 매듭을 지으려고도 했다. 실제로 이제는 사용 정지를 당해서 못 하는 트위터에서 트럼프는 ‘big league’라는 표현을 사용한 포스팅을 수차 하기도 했다. 당시는 트럼프가 공화당의 경선을 치르는 후보 중의 하나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을 때라,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할 만큼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

맨 위의 영어 문제 풀이를 하면, 모두 답이 될 수 있다. ‘bigly’나 ‘big league’나 모두 써서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비글리’로 들었고, ‘bigly’라고 한 것 같은데, 그의 아들에 이어 트럼프 자신까지 ‘big league’라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과 다른 단어가 튀어나왔는데, 본인은 끝까지 자기가 생각한 단어를 그대로 뱉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실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 어쨌든 말의 뜻은 통한다. 사람들에게 통하는 상식에 기초한, 일정 수준의 품격을 지닌 영어를 써야 한다는 이들에게는 어떤 쪽으로 썼든 트럼프의 표현은 써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것들이었다.

한국 대통령의 미국 방문 중의 표현을 가지고 국민 청력 테스트를 하는 소동이 벌어지면서, 6년 전 미국에서 트럼프의 말로 벌어진 비슷한 해프닝이 생각났다. 그런데 트럼프의 ‘big’ 소동과 비웃음 뒤에 사람들이 당시는 잘 알아차리지 못한 반전이 이어졌다. 잘 알려진 것처럼 트럼프의 주요 지지자는 상대적으로 학력이 떨어지고,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 중 상당수가 트럼프가 쓴 단어를 가지고 비웃는 이들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며 아는 체하는 뻔뻔한 지식분자로 보며, 트럼프를 지지하는 강도를 더욱 높였다. 지지자 결집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결국 트럼프는 대선이라는 ‘big league’에서도 그가 장담한 대로 표 차이를 떠나 ‘bigly’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승부 결과 자체도 반전이었는데, 그 중간에 이런 표현을 둘러싼 소소한 반전이 있었다.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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