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글자도 새기지 않고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글자도 새기지 않고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11.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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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20세기 이전 중국 역사에 관한 한, 언어를 따지지 않고 모든 자료를 머릿속에 지니고 있었다는, 인간 도서관과 같은 면모를 지닌 대학자 진인각(陳寅恪)은 당연히 수많은 저작과 시문을 남겼다. 그중 대표작으로 북경대 동료 교수이기도 했던 왕국유(王國維)를 추모하며 청화대학 안에 세운 비문에 새긴 ‘청화대학왕관당선생기념비명(清華大學王觀堂先生紀念碑銘)’-관당(觀堂)은 왕국유의 호 중의 하나이다-을 꼽는 이들이 많다. ‘독립정신, 자유사상(獨立之精神,自由之思想)’으로 왕국유의 일생과 사상을 관통하는, 광고로 치면 핵심 콘셉트를 뽑은 그의 글은 기념비에 새긴다는 실용적 목적을 넘어서, 왕국유의 죽음을 두고 후세가 기리고 추구해야 할 핵심들을 제시한 명문이다.

안타깝게 50대 초의 나이에 세상을 뜬 고교 시절 친구의 추도사를 떠밀려 쓴 적이 있었다. 전날 늦게까지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창 친구들과 울다가 웃다가, 그 사이사이를 메꾼 술의 자욱이 진하게 남았던 다음 날 내내 술 냄새를 담아서 한숨과 눈물을 뿌리며 썼다. 그러면서 한 사람을 그리는 추도사나 망자의 살아 생전 행실을 간명하게 쓴 행장(行狀)과 그를 바탕으로 쓴 비문(碑文)이 의례 형식으로만 지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인각이 친구를 기린 글까지도 다시 찾아 읽게 되었다. 졸문들을 지난 20년간 거의 매주 여러 지면에 싣는 생활을 해왔는데, 기억에 남고 나름대로 아끼는 글의 첫째나 두 번째로 먼저 간 고교 친구를 두고 쓴 추도사를 스스로 꼽는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친구를 기리며 썼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가슴속에 있는 슬픔과 그리움의 절반이나 담았을까 싶다. 글은 생각의 반을 옮기지 못하고, 글을 말로 전달하며 거기서 또 반이 되지 못한다. 선동하는 목적이라면 다르겠지만, 누구 한 사람을 놓고, 특히 죽음을 두고 쓴 글은 더욱 그러하다. ‘가이 없다’라는 우리 말 표현이 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라는 ‘어머니의 마음’ 마지막 소설의 가사에 나와서 익숙한 표현이다. ‘가이’는 가장자리, 그중에서도 ‘바닷가, 강가’ 물가’ 등의 ‘가’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이 없다’는 ‘끝이 없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노래에서도 그렇지만 ‘가이’라는 단어가 쓰임으로써 ‘끝’을, 곧 한계를 규정해버린 느낌이 든다. 어쩌면 차라리 가사가 없이 연주만으로 ‘어머니의 마음’ 노래를 들을 때 그 희생과 사랑이 더욱 크게 와닿을 수 있다.

그런 큰 뜻이 있어서였을까. 이번 이태원 참사에 애도 리본을 ‘근조(謹弔)’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게 가슴에 달라는 정부의 지침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조화들은 보낸 사람의 이름만 있고, 아무런 메시지 없이 하얀 리본만 매달려 있기도 했다. 아무 문구도 없는 검은색 민자의 근조 리본과 공백 상태의 조화 문구를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해서 슬픔을 더욱 크게 느끼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사람들로 하여금 다지게 하는 효과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글이 써져야 하는 공간에 아무것도 없이 백지로 있을 때와 같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대학 시절에 몸으로 경찰과 부딪치는 시위 말고, 저항을 표현하는 약간 온건한 방식은 수업이나 시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좀 약한 형식으로 시험을 치기는 하지만 백지 답안을 써서 제출하기도 했다. 백지 답안을 내기로 사전에 약속한 한 시험에서 모든 친구가 시작하자마자 이름만 쓰고는 줄지어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갔는데, 한 친구만이 열심히 답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시험 종료 시각에 맞춰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온 친구의 말인즉슨, 백지 답안으로 시험을 거부하는 이유를 주제로, 교수님께 알려드리는 형식의 글을 썼다고 한다.

실제 ‘백지 시위’도 나왔다. 2020년 7월 홍콩에서 보안법이 발효되고, 구호를 외치거나 써서 보이는 행위를 하면 구금을 하자, 시민들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피켓을 들고 가만히 한자리에 서 있는 시위를 했다. 아무 글씨도 없지만, 모두가 거기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안다. 50년 가까이 세월을 거슬러 가서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기괴한 사건이 일어났다. 1974년 12월 동아일보는 광고가 실려야 할 지면 몇 군데가 백지인 채 신문을 발행했다. 정부는 광고주와 동아일보의 문제라고 했지만, 어떤 연유로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많은 이들에게 자명했다. 곧 그 백지 지면을 동아일보를 응원하는 시민들의 격려 광고가 채우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라고 역사에 남은 사건이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였던 측천무후의 묘비 비석에는 아무런 글자가 없어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른다. 그의 유언에 따라서 그리했다는데, 그 이유로 두 가지 설이 있다. ‘공덕이 너무 많아 비석 하나에 채울 수 없다’라는 오만함 혹은 ‘평가는 후세 역사에 맡긴다’라는 겸허함 때문이라는 상반된 설들이 있다. 사실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 자체도 엇갈린다. 그런 오락가락 대립이 아니라 이번 무언의 근조 리본이나 조화는 더 큰 슬픔을 담기 위한 배려라고 보고 싶다.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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