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털면 먼지가 난다는 ‘막수유’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털면 먼지가 난다는 ‘막수유’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10.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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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위키피디아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중국 송(宋)나라 때의 장수 악비(岳飛)는 평가가 엇갈리고 그에 얽힌 진실 자체가 모호한 부분이 많은 ‘문제적 인간’이다. 한국인들에게는 중국 식당 이름 중의 하나로 익숙할 ‘만강홍(滿江紅)’은 중국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 유명하다. 송나라의 황제가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잡혀갔던 ‘정강지변(靖康之變)’의 치욕을 오랑캐들을 무찌르고 설욕하고 천자를 만나겠다는 복수와 충성의 마음을 다지는 피 끓는 시의 제목으로, 악비가 지은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악비 사후에 나온 문집을 비롯한 기록에 이 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시에 나오는 지명이나 상황을 고려할 때 300년 후의 명(明)나라 때 지어져, 악비의 작으로 위장했다는 게 현재는 정설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우와 함께 군신(軍神)으로 칭송되는 인물이 그 충성심과 정의감을 드러낸 작품이란 배경을 믿고 싶어 하며 그렇게 얘기한다. 악비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위작 작가의 누명이 후대에 씌워진 셈이다.

악비가 금(金)나라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 역시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악비의 전공이라는 게 대부분 송나라 쪽의 기록에 근거했다. 게다가 후대로 갈수록 원래의 기록보다 과장이 되고, 때로는 악비 후손의 서술이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그와 싸웠다는 금나라의 기록에는 악비가 패배하거나 우물쭈물하다가 공을 세울 기회를 놓쳐버리는, 군신(軍神)과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 나온다고 한다. 악비 사후의 과장된 기록을 당사자가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역시 악비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

유약한 이미지로 역사에 남아 있는 송나라에서 그나마 악비는 금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맞서 싸우자는 결기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소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고, 황제의 곁을 굳건히 지켰으나 소통에는 능하지 못했다. 청렴하게 군대를 운영하고 자기 주변을 깨끗하게 하려 노력했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은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악비가 부러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세속 조류와 타협하는 다수의 군신에게 미운 털이 박혔으리라. 악비가 명분을 내세우며 황태자를 세우라고 건의했다. 결정적으로 황제마저도 좌지우지하는 듯한 전횡이라고 공격당할 거리를 제공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줄곧 금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악비는 금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며 전쟁만은 피하자는 주화파(主和派)들에게는 애당초부터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주화파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승상 진회(秦檜)는 줄곧 악비를 모함하고 뒷조사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파도 딱히 죄가 될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악비와 친분이 있으며, 금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의 거두였던 한세충(韓世忠)이 보다 못해 진회에게 "악비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소이까" 하고 따졌다. 진회가 "막수유(莫須有)"라고 했다. 이로부터 ‘막수유(莫須有)’란 말이 널리 알려졌다. 한문이 그렇듯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있을지도 모른다’, ‘없다고 할 수 없다’ 등등인데, 털면 나올 것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전근대적인 유죄추정(有罪推定)의 원칙을 바탕에 깔고 있다. 터무니없이 상대에게 누명을 씌워 모함하고, 죄인으로 만들 때 쓰인다. 결국 황세자 책정을 기화로 한 진회의 모함성 주청으로 악비는 처형당한다.

역사 인물들의 상당수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음 이후의 평가가 갈리곤 한다. 악비도 죽은 이후 세상에서 변화하는 세파에 부침을 겪게 된다. 몽골의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했음을 내세운 명나라는 악비의 원을 풀어주었고 그 정신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며 악비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악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회는 만고의 역적이자 비열한 인간의 전형으로 낙인찍혔다. 진회와 그의 처까지 꿇어앉은 죄인 형상의 동상으로 악비의 묘 앞에 전시해 놓았다. 침 뱉고 조롱하라고 조장한 그 동상들에는 이제는 침을 뱉지 말라는 경고성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경비원들도 그다지 열심히 막지는 않고, 관람객들도 스스럼없이 의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침도 뱉고 오물을 투척하여 응징(?)한다. 진회 일가에 대한 모진 사후 처벌에 비례하여 악비 숭배의 정도는 올라갔다. 이런 반전에도 ‘막수유’는 쓰기 좋은 말이다. ‘어찌(須) 일어나지(有) 않는다(莫) 하겠는가.’ 이와 함께 요즘 시국과 겹쳐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당신이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으면 귀신이 문을 두드려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1978년을 중국은 경제개방 원년이라고 한다. 이후 개인사업자인 개체호와 사기업들이 생겼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서는 항상 반동이 있는 법이다. 1981년에 중국 국무원은 ‘투기폭리 타도’를 기치로 하는 운동을 벌였고, 즉시 사기업에 대한 견제와 압력이 시작되었다. 텐진에서 냉간압연공장을 세워 번창하고 있던 위저민이란 이는 당연히 국영기업과 원자재를 놓고 다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역시나 국무원의 운동 문건이 나온 후 철강재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다고 해서 위저민의 공장에 현으로부터 조사팀, 우리로 치면 감사팀이 파견되었다. 위의 말은 조사에 대해 항거하는 위줘민에게 조사팀 사람이 한 말이다. 이런 말을 회사에서 감사 쪽 같은 데서 하는 경우도 있으니, 검찰에서 누군가를 두고 표적 사정을 할 때 하는 것을 언론을 통해 보기도 했다. ‘잘못이 없으면 조사에 응하고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이었다.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것인가? 위줘민은 정말 용감한 사람이었나보다. 조사팀 사람의 위와 같은 말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설령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다고 해도 귀신이 당신 집 문을 두드리면 생활이 편하겠습니까?"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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