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비속어를 잠 재우는 반전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비속어를 잠 재우는 반전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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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자동차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시발자동차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가면 연한 푸른색의 지프차처럼 생긴 자동차가 크기만큼이나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하며 전시되어 있다. 단체로 관람하러 온 중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그 앞에서 ‘야, 저거 봐라’라고 하며 번호판 있는 곳을 가리키며 킥킥대고 웃는다. 번호판과 함께 간 친구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욕설처럼 들리는 말을 한다.

“야, 시발이래. 시발, 시발이야.”

자동차 번호판이 달렸음 직한 곳에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로 ‘시발 1955년’이라는 안내판이 달려 있다. 욕으로 써 놓은 건 당연히 아니고, ‘시발’은 1955년에 한국에서 조립하여 나온 차의 이름이었다. 최초의 국산 자동차라고 얘기를 하는데, 딱히 그렇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찜찜하다. 미군에서 나온 지프차를 기본으로 하여, 지금으로 치면 철공소 같은 곳에서 드럼통을 두드려 펴고 암시장에 나온 부품들을 이리저리 모으기도 하고, 직접 만들기도 하여 조립해 시장에 내놓았다. 그래도 국산 부품의 비율이 50%가 넘었으니 국산 차라고 하며, 산업박람회에서 ‘리승만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자로 ‘처음으로 나온’이란 뜻의 ‘始發’을 그냥 한글로만 표기하니, 비슷하지만 센 발음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욕설 중의 하나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주로 택시나 관공서의 차로 풀려서 서민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사며 당시에도 부러 센 발음으로 욕처럼 부르기도 했다. 그 앞에서 한참 서로 ‘시발’을 외치며 장난을 치던 아이들에게 다른 어느 전시물보다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마케팅 용어로 하면 그저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이름을 부르며 노는 일종의 ‘유대 engagement’가 일어났으니까. 처음 세상에 나올 때 만들어진 브랜드명이었고, 5년 이상 3천 대 가깝게 팔려서 노출되었던 역사를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차라리 아이들이 그렇게 재미있어하는 걸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게 낫다.

시발카드
시발카드

‘시발’이라는 단어가 브랜드명으로 다시 나타났다. 2019년 9월 14일 BC카드에서 ‘시발 카드’라는 상품을 내놓았다. "커피, 쇼핑, 택시 등 말 그대로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욕하면서 쓰게 되는 돈이라는 뜻의 신조어인 '시발 비용'이라는 인터넷 용어에 착안했다"라고 했다. 인터넷 용어에 익숙한 세대가 처음으로 독립해서 하는 사회생활에 쓸 ‘첫 카드’라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도발적인 네이밍이라는 반응과 함께 초기 관심을 받는 데는 성공했던 것 같으나, 이후의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여자배구의 김연경 선수가 경기에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내뱉던 말과 제품을 연결하여 문자 그대로 ‘식빵’을 내놓아서 꽤 히트한 것과 비교가 되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

사람들의 연상이나 이미지를 직선으로 그어, 한쪽을 ‘욕설’로 다른 쪽을 ‘상품’으로 놓고 본다면, 신용카드의 ‘시발’은 ‘욕설’에 가까웠다. ‘식빵’은 김연경 선수가 그려져 있지만, 상품을 바로 연상시켰다. 시발 자동차도 처음 나오던 1950년대 중반의 사람들이 한자어가 익숙한 만큼 ‘처음 나왔다’라는 상품의 의미가 먼저 다가왔다. 시발 카드는 부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의식했는지 ‘시발’에 자꾸 다른 의미를 덧붙이고 변명하려 했다. 그럴수록 더욱 깊은 시발의 늪에 빠졌다.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거의 목을 매다시피 하던 제5공화국 시절의 이야기이다. KBS에서 당시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던 저녁 9시 뉴스 앵커가 미국 모 방송국과 직접 영상 연결을 해서 인터뷰하며 방송을 진행하기로 했었다. 미국 방송국 측에서 약속된 시간에 나오지 않자, KBS의 앵커가 혼잣말 비슷하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전파를 타고 나왔다.

“새끼들이 시간을 안 지키네.”

방송 언어의 격식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에 일상에서 흔히 쓰기는 하지만 비속어로 분류되는 ‘새끼’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문제 삼는 말들이 나왔다. 거기에 감히 미국을 향하여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소리까지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이크가 켜진 걸 모르고 비속어가 방송 전파를 타고 나오게 한 건 문제지만, 미국 애들이 잘못했고 그걸 지적한 내용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워낙 미국에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던 독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그렇게 미국 방송, 정확히는 방송 담당자들에게 욕설 비슷한 걸 섞어서 말했다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는 이도 있었고, 심하게는 앵커가 강단이 있다고 과한 칭찬까지 나왔다. KBS나 당사자 앵커는 가만히 있는데, 여론이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선회했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 중의 비속어 사용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해석하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걸 바로잡겠다고 어설프게 대응할 때 이슈는 마치 기름을 끼얹은 양 더 거세게 타오른다. 가을에도 ‘벚꽃 엔딩’이요, ‘벚꽃 연금’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패러디가 풍년이다. 괜한 소리 말고 풍자와 해학을 즐기도록 하라. 그게 느리지만 가장 빠른 반전을 이룰 방책이다.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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