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신은 여왕을 지키고, 우린 빅엿을 먹이지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신은 여왕을 지키고, 우린 빅엿을 먹이지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9.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처 AP/BBC
출처 AP/BBC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2022년 9월 19일은 한동안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Elizabeth) 2세의 국장이 행해진 날로 기억될 것이다. 영국 역사에 기억에 남을 날들은 많겠지만, 21세기 들어서 이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날들은 손꼽을 만하다. 국장일은 지금이야 그 열기에 휩싸여 최대의 관심이 쏟아진 날이라고 하겠지만, 영국의 역사에 미친 21세기에 벌어진 사건으로 치면 두세 번째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혹시나 이번 국장을 계기로 영국 왕실의 특권이 폐지되고 공식적으로 국가원수의 지위도 박탈된다면 순위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벤트인 영국 여왕의 국장보다 앞선 순위가 될 수 있는 사건들은 무엇일까? 2012년의 런던 올림픽과 2005년의 런던 테러를 들 수 있다. 올림픽이나 테러는 영국 아닌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으니, 영국적이고 영국 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좀 있다. 정말 영국답고 그 여파가 오래갈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21세기 영국에서 벌어진 최고의 사건은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Brexit)이다. 한 날만 꼽으라면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가 벌어진 2016년 6월 23일이다.

51.9%가 찬성하는 예측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선거일 직전까지 벌어진 대부분의 예측조사는 4%에서 8%까지 반대가 앞선다고 나왔다. 특히 대부분 언론기관에서는 브렉시트의 불합리함을 강력하게 설파해서 눈에 띄는 분위기는 더더욱 브렉시트 반대 여론을 확인하는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했다. 같은 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당선으로 끝난 미국 대통령 선거와 더불어 사전 조사의 악몽으로 꼽히는 투표였다. 여론조사의 한계와 더불어 지식인이라는 이들에 대한 조롱이 찬성 표를 던지고 이끈 보수층에게서 마구 나왔다. 1970년대 미국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언급하면서 대중에게도 널리 퍼진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란 말이 유행을 탔다. 그런 조롱을 퍼부으며 기고만장함의 끝장을 보여줬던 대표적 인사가 보수당의 앤드루 로신델(Andrew Rosindell)이었다.

극우 보수 성향을 보이는 정치권 인사임을 입증하듯 원래부터 논란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런 이들의 단골 메뉴인 횡령 혐의, 외국의 독재 정권 찬양, 여성 비하 발언들로 얼룩 범벅이었던 인물인데, 영국 국가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브렉시트 찬성에 앞장섰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중 하나로 영국 국영방송인 BBC의 대표 채널인 BBC One은 방송 종료할 때 영국 국가(國歌)인 ‘God Save the Queen’을 틀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압력을 넣었다. 한국에서도 예전에 태극기를 내리는 국기 하강식이 열리는 오후 6시에 일제히 틀었고, 그러면 전 국민이 가슴에 손을 얹고 부동자세로 예의를 표하는 시대가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부부싸움을 멈추고 엄숙 진지한 표정으로 애국가가 나오는 쪽을 향해 서는 장면으로 더욱 알려진 풍경이다. 당시는 영화관에서도 본 영화 상영 전에 애국가를 특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그런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놀랍게도 BBC Two의 대표 뉴스 프로그램인 ‘BBC newsnight’에서 ‘까짓것 따라주지’라고 하면서 실제 노래를 틀었다. 자존심과 품격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에 대한 경멸감을 보여주려 애쓰는 듯한 표정과 말투의 진행자가 내놓은 멘트가 인상적이었다.

You might have seen the demand by Conservative MP Andrew Rosindell that BBC One should play God Save the Queen at the end of the day's programming to mark our departure from the EU. Well, we're not BBC One and it's not quite the end of the day, but we're happy to oblige. Good night. 

(보수당의 앤드루 로신델 의원이 우리가 유럽연합에서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도 BBC One이 매일 방송 종료할 때 국가인 ‘God Save the Queen’을 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들으셨을 겁니다. 우리는 BBC One도 아니고, 지금이 하루 방송 끝나는 시간도 아니지만, 기꺼이 따라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멘트에 이어 바로 ‘God Save the Queen’이 화면을 장식하는 뮤직비디오와 함께 터져 나왔다. 영국 국가가 아닌 펑크록의 개척자로 유명한 밴드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같은 제목의 노래였다. 노래 자체가 섹스 피스톨스의 대표곡이자 록 역사의 분기점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사를 보면 여왕과 그로 대표되는 기존 체제에 속된 표현으로 엿을 먹이는 노래이다. BBC에서 이런 노래를 튼 것 자체가 엄청난 반전인데, 가장 큰 엿을 먹은 이는 국가 송출을 주장한 바로 극우 보수 국자주의자인 로신델이었다.

God save the queen 

The fascist regime 

They made you a moron

A potential H bomb

(신이여, 여왕을 지키소서

이 파시스트 정권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지

수소폭탄으로 위협하며)

God save the queen

She's not a human being 

and There's no future

And England's dreaming

Don't be told what you want

Don't be told what you need

There's no future

No future

No future for you

(신이여, 여왕을 지키소서

그는 인간이 아니야

미래는 없어

영국은 꿈만 꾸지

원하는 걸 강요하지 마

필요한 걸 말하지 마

미래는 없어

우리에게 미래는 없어)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