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트리클다운’이여 ‘내 입술을 읽어줘’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트리클다운’이여 ‘내 입술을 읽어줘’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5.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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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umanact.org
출처 humanact.org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면, 그들이 소비를 많이 해서 전체 경기가 좋아진다. 기업들의 법인세도 낮춰서 줄이면, 남는 돈을 적극적으로 생산에 투자하여 경제 활력을 증진한다. 그에 따라 저소득층 서민들의 고용률과 소득도 늘어 전체 계층에 도움이 된다.’ 이런 의미나 바람을 담아 낙수효과, 영어로 ‘트리클다운(trickle-down)’이란 낱말로 주로 표현한다.

실제 그런 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입증된 지 오래되었다.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더라도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만 보자. 레이건이 부유층이 특혜를 입은 감세를 부르짖는 소위 레이거노믹스로, 그가 대통령이 되기 십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던 감세에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트리클다운을 부르짖으며 부유층 세금이 줄거나 정부의 지원이 기업과 사회 상층부에 더 많이 투여된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략 이후 나타난 현상들만 생각나는 대로 써보자.

- 부유층의 소득이 늘어나는데 그만큼 소비하지는 않는다. 정확히는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 기업의 CEO와 직원들의 수입이 10배 아래였던 한 자리 수 시대가 그리 멀지 않게 있었다. 이제 한국도 100배 차이가 나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CEO들이 직원보다100배 이상 소비를 할까?

- 게다가 부유층의 ‘통 큰’ 소비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일어난 수익이 그들 사이에서 돈다. 명품으로 대표되는 '과시적 소비'를 보라. 선별된 이들만이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파티, 패션쇼, 매장 등에서 유통되며, 컵 정도로 시작한 가치가 대형 욕조 밖으로 흘러넘칠 지경이 된다. 그러나 제품들을 만드는 다수의 사람에게 떨어지는 건 그야말로 한 컵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두 방울에 불과하다.

- 부유층은 늘어난 소득으로 금융 부문에 투자하여 더 큰 돈을 번다. 정보와 리스크 매니지먼트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전문적 금융 서비스를 받는다. 정보도 부족하고 소득이 낮은 이들은 금융 피해의 대상자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트리클다운’이란 용어는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이 1904년에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짐멜은 금융 쪽 보다는 패션 유행에 주목하여 이 개념과 낱말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는 부유층이 ‘소비 탐닉orgy of spending’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새로운 소비 시대를 선도하면, 중간층은 부유층의 사치를 모방하고, 하류층은 중간층을 모방한다고 했다. 그래서 맨 밑바닥에도 매우 사회적인 성격을 띤 과시적 소비가 발생하며 그것은 생각보다 매우 견고한 관습이 된다는 것이다. ‘비쌀수록 더 잘 팔린다’라는 경제 상식을 벗어난 효과에 붙은 이름으로도 유명한 베블런도 사회의 하층민들조차도 필수 생계 품목이 극단적으로 부족해지기 전까지는 이런 과시적 소비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비슷한 주장을 했다.

몇십 년에 걸쳐 경제에 긍정적 효과가 없다는 입증이 되었지만, 선거때만 되면 세금을 깎겠다는 공약이 나온다. 세금 관련해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중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정식 후보로 선출되면서 아버지 조지 부시가 ‘Read my lips’라는 표현을 쓴 게 특히 유명하다. 직역하면 ‘내 입술을 읽으세요’, 곧 뭐라고 말하는지 잘 보시라는 정도의 말이다. ‘믿어 주세요’라고 강하게 얘기하는 식이다. 이 한마디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고, 밈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시의 이 표현과 연관되어 재미있는 반전들이 있다.

먼저 부시는 세금을 깎아주겠다며 ‘믿어 주세요’ 식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저 말 뒤에는 ‘새로운 세금 없음(No new taxes)’이 따라붙었다. 나중에 의회에서 다수였던 민주당에 밀려 세금을 인상하며 ‘새로운 세금 항목’은 없다는 식으로 변명하려고 했지만, 비겁하다며 더욱 큰 비난만 초래했다.

비난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인사는 아군인 공화당에서 나왔다. ‘입술을 읽어달라’가 나온 다음 임기의 대통령 선거가 열린 1992년에 공화당 후보 자리를 노린 팻 뷰캐넌이 부시를 공격하는 포인트로 바로 그 표현을 잡았다. 거짓말쟁이에 비겁한 자로 부시를 밀어붙였다. 결국 부시가 공화당 후보가 되기는 했지만, 초반 뷰캐넌 돌풍과 부시의 고전에 바로 이 표현이 큰 역할을 했다.

이 표현을 제대로 우려서 1992년 민주당이 써먹었다는 사실이 부시와 공화당으로서는 더욱 아픈 부분이었다. 미국 대선 캠페인 역사상 최고의 슬로건이라고 꼽히는 ‘It’s economy, stupid(바보야, 문제는 경제라고)’의 추임새 역할을 확실하게 했다.

‘트리클다운’과 반대로 '트리클 업(trickle up)', '분수효과'라고 번역되곤 하는 개념도 있다. 서민복지를 강화하면서 경기를 활성화하자는 정책이다. 기본소득 같은 게 대표적이다. 이런 걸 얘기할라 치면 '공산당', '빨갱이'라고 하곤 했다. 그런데 그걸 말하던 이가 대통령이 되어버렸다. 트리클다운을 내세우다가 2023년과 2024년에 각각 56조 원, 30조 원의 세수 결손을 기록한 정부의 책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경제 상황이 나빠서 그랬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침묵의 외침인가.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서경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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