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워라밸을 원하십니까?... 애플티비 플러스 ‘세브란스: 단절’

진정한 워라밸을 원하십니까?... 애플티비 플러스 ‘세브란스: 단절’

  • 안소현
  • 승인 2022.06.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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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시작은 파친코였다. 파친코 소설을 완독한 나는 파친코 드라마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애플티비. 기계치인 나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OTT였다. 그러나 간절함은 모든 것을 이기는 법. 장장 4시간에 걸쳐 티비에 남편의 애장품 플레이스테이션4를 연결하고(남편이 육성하던 축구팀의 주옥같은 승리의 기록들을 다 날려버릴 위기를 한차례 겪은 후) 애플티비를 다운 받아서 기어이 파친코를 보고야 만 것이다. 하루 만에 파친코를 다 몰아본 나에게 애플티비는 스리슬쩍 ‘세브란스: 단절’이라는 생소한 드라마 하나를 들이밀었다. 어떤 드라마였냐고? 정말이지 이상한 드라마였다. 칼럼으로 쓰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우리 모두는 그럴 때가 있다. 중요한 보고가 다음날 아침인데 새벽 한시가 넘도록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때. 모니터 속의 커서는 깜빡 거리며 나를 재촉하지만, 머리는 오래된 치약처럼 굳어서 쥐어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나를 비웃듯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내 간절한 마음이 된다. 누가 좀 대신 해줬으면. 눈 감았다 뜨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되어있었으면. 이럴 때도 있다. 실연을 당한 다음날 아침. 세상이 끝나버린 것 같은 기분이지만, 먹고 살기 위해 회사는 가야할 때. 자꾸 실연의 기억이 밀려들고 눈물이 차오르는 와중에 꾸역꾸역 일을 해야 할 때. 우리는 생각한다. 실연의 기억을, 아니 사랑했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다고.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상사에게 된통 깨지고 집에 돌아온 날, 고대하던 데이트를 해도, 맛있는 걸 먹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때. 일 따위가 나의 행복을 방해한다고 느낄 때.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회사 밖으로 가지고 나오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마, 이 드라마를 처음 구상했던 사람도 그런 경험 몇 개쯤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일과 삶을 ‘단절’시키는 내용의 이 드라마를 생각해낼 수 있었겠지. 그렇다. 이 드라마 제목에서 말하는 ‘단절’은 직장생활과 삶의 단절이다. 어떻게 그걸 단절하냐고? 공간에 따라서 기억을 분리시키는 ‘단절(세브란스)’이라는 시술로 한다. 뇌에 칩을 넣어 직장에서의 기억과 삶에서의 기억을 분리해버리는 것이다. 이 시술을 받으면 회사에 가는 순간 모든 것을 잊는다. 회사 밖의 내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출근 전 아침엔 뭘 먹었는지. 싹 다 잊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회사 밖의 내가 누군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회사에서의 기억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퇴근 시간이 되어 회사를 나서면 회사 밖의 내가 깨어난다. 이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내가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내 직장동료는 누가 있는지. 오늘 상사한테 깨졌는지 아니면, 성과를 냈는지 전혀 모른다. 직장동료를 회사 밖에서 마주치면? 당연히 못 알아본다. 물론, 취지는 나쁘지 않다. 직장과 삶을 완벽하게 분리함으로써 워라밸을 지키고 직장에서 업무능력도 향상시키는 것.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요즘 종교처럼 신봉하는 ‘워라밸’의 가장 궁극의 형태인 셈이다. 아무래도 워라밸(워킹 라이프 밸런스)보다는 워라단(워킹 라이프 단절)이 더 맞는 표현 아닐까 싶긴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 마크도 ‘단절’ 시술을 받고 루먼이라는 회사에서 MDR팀의 팀장으로 일하며 완벽한 워라밸을 누리고 있다. 사실 마크가 원한 건 워라밸보다 더 절실한 것이긴 했다. 몇 년 전 차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마크. 깨어있는 시간동안 특히 일하는 시간 동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감당할 수 없었던 마크에게 ‘단절’ 시술은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일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고, 아내의 죽음도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시술’이 그렇듯 부작용이 있다. 이 경우에는 더 심각하다. 회사 밖의 ‘나’야 뭐 손해 볼 것 없지만 문제는 회사 안의 ‘나’이다. 회사 안의 자아는 오직 회사에서만 존재한다. 한마디로, 잠을 잔 기억도 집에서 쉰 기억도 없는데 그저 눈을 뜨면 매번 회사인 것. 이보다 끔찍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이 시술은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들어 그런 끔찍한 삶을 선물하게 되는 거다. 하지만 회사 밖의 마크는? 회사 안의 마크의 하루가 끔찍한지 어떤지 알 길이 없다. 아무런 기억도 공유되지 않으니까.

드라마는 끝없이 회사 밖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신입직원 헬리와 회사를 그만둔 줄 알았던 마크의 전 직장동료 피티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회사 안의 마크도, 회사 밖의 마크도 이들을 만나면서 점점 동요하게 된다. 과연 ‘단절’ 시술은 옳은 일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드라마는 전형적이지 않다. 쫄깃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건이 휘몰아치지도 않는다. 우리네 직장생활처럼 어떤 면에서 단조롭고 정적이다. 하지만 그 특유의 매력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러다 마지막 회.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며 끝난다. 시즌2를 제작하기로 했다는 소식 먼저 접하지 않았다면, 마지막 회까지 보고 애플 본사에 찾아갈 뻔 했다. (진심이다.)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은 분리될 수 있을까. 워킹과 라이프는 과연 밸런스를 찾을 수 있을까.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후반부로 가면서 ‘나’는 누구인가. ‘어디까지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등 철학적인 질문으로 점차 심화되어간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 마크는 고군분투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우리 자신과 닮아있다. 

드라마를 보며, 분리된 기억에 괴로워하는 마크를 보며, 문득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치매에 걸리셨던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와 이모를 볼 때마다 ‘느이 엄마는 왜 안오냐’고 물어보셨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지 20년도 더 됐는데도 할아버지의 기억 속엔 외할머니는 돌아가신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외할아버지를 보며 생각했었다. 외할머니 장례식에서 엉엉 울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워 밤에 잠 못 이루시던 외할아버지는 어디로 가신 걸까. 할아버지는 여전히 할아버지이신걸까.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어느 상태까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걸까. 나를 나이게 만드는 건 어쩌면 9할이 내가 가진 기억인데 그 기억이 없는 ‘나’는 과연 계속 ‘나’일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회사 밖의 마크와 죽은 아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회사 안의 마크를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안 좋은 기억은 차라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없었던 일 마냥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죽은 아내를 기억하지 못하는 마크를 보며, “느이 엄마가 죽었어?”하고 반문하시던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그 기억마저도 ‘나’를 ‘나’로 만드는 그 무엇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미리 선언해본다. 나는 절대 ‘단절’ 시술을 받지 않겠다고. 눈을 감았다 뜨면 시즌2가 나와 있을 수 있게 시즌2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을 ‘단절’해보는 건 조금 고민되긴 하지만.

 


안소현 Wieden and Kennedy Tokyo 카피라이터 

※ 한국광고총연합회 발간 <ADZ> 칼럼을 전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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