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화신(和信)은 사라지고 미츠코시(三越)는 문화재로 남고

[신인섭 칼럼] 화신(和信)은 사라지고 미츠코시(三越)는 문화재로 남고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19.05.2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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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백화점과 롯데 영플라자의 옛 모습
신세계 백화점(위)과 롯데 영플라자의 옛 모습

1937년 10월, 서울 종로 네거리에 조선총독부를 제외하면 한국 최대의 빌딩이 들어섰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 조선인 박흥식이 경영하는 화신 백화점이었다. 이 무렵에는 서울 충무로에 지금의 신세계 - 해방 전에는 미츠코시, 남대문로의 롯데 영플라자 - 해방 전에는 미나까이(三中井), 그리고 퇴계로 밀리오레 자리에 또 다른 일본 백화점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 생긴 지하 1층, 지상 6층의 조선인 백화점 화신은 다른 백화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위용이 당당했다.

당시 화신 백화점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백화점’으로 종로의 명물이자 조선 전체의 자랑거리였다. 특히 화신 백화점 서관에 들어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는 장안의 화제거리였고, 시골 사람들의 관광 코스가 될 정도였다. (필자도 1942년 초등학교 6학년 졸업 수학여행 때 경성(서울)에 와서 이 화신 엘리베이터 탔다.)

"질색할 노릇은 시골에서 오는 손님들이 승강기를 타고 싶어서 공연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를 여러 차례 하고, 또 종로인 만큼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 몰려 들어와 손님 노릇을 하는 때도 일일이 ‘고맙습니다’ 소리를 하게 되니 까 질색이지요..." 국사편찬위원회 편 <장사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지상 경제의 변천> (두산 동아 출판)

1942년 12월 연말 사은 대매출 포스터가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1년 뒤였으니 “비상 시국에 즉응하는 대봉사!”라는 글귀가 들어 있다. 일본식 글의 표현도 있고, 한문이 태반이지만 한글도 섞여 있다. (초등학교에서도 조선어 사용은 이미 사라진 무렵이었다.)

1942년 화신 백화점 연말 세모대매출 포스터
1942년 화신 백화점 연말 세모대매출 포스터

박흥식은 그의 친일행각 때문에 반역자가 되었고, 그가 지은 (조선 총독부 버금 가는) 한국 최대의 건물도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 경제 침략의 선봉장이고 상징이던 미츠코시 백화점은 서울시 문회재로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의 유산을 모두 없앨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 남대문로의 한국은행도 옛 조선은행이다.) 건물 없앴다고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역사는 역사이니까.

 


신인섭 (전)중앙대학신방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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