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예외가 없는 일: 사람은 언젠가는 간다.

[신인섭 칼럼] 예외가 없는 일: 사람은 언젠가는 간다.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1.11.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외가 없는 일: 사람이 한 일은 남는다. 그리고 지울 수가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 일: “6•29 선언”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누구나 예외 없는 일 - 가는 길을 갔다.

2021년 10월 26일. 89세. 1988-1993년 5년 동안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서울 올림픽의 해에 취임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숫자 셋, 마침표 하나, 그리고 글자 둘이다. “6•29선언(宣言)” 1987년 6월 29일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의 대표 위원이며 뒤에 여당 대통령 후보가 된 노태우는 흔히 말하는 군사독재를 끝낸 사람이다.

그의 임기 5년 전후에 광고와 PR에 일어난 사건은 놀랍다. 정치에 일어난 일은 첨부한 1987년 6•29 선언 전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전 사진 몇 장에 잘 나와 있다.

1987년 6월 29일 신문 보도 : 조선일보, 서울신문 호외

두 신문 보도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글로 한다.

노 대표, 직선 개헌 선언

지자체•언론 등 민주화

당 개헌안 내주 말 확정

민정, 직선제 선언

김대중 씨 사면 복권 건의

조속 개헌... 새 헌법으로 대통령 선거

내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 실현 (조선일보와 서울신문 두 신문 머리기사)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6•29 선언 여덟 가지 수습안 가운데 다섯째는 자유 언론의 창달이다. 간단히 말해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 회복이고 1980년 말에 만든 언론기본법 폐기로 나타났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지도자의 사진이 있는 머리기사는 “어려운 결단, 훌륭한 결정 두 김 씨 환영”이었다.

1987년 6월 30일 조선일보 사설과 보도에 대한 김영삼, 김대중의 반응, 노태우 대통령 취임 선서(대통령기록관)

아마도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치열했던 1987년 선거전 결과 득표 비율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가 36.6%, 2위 김영삼 28.0%, 3위 김대중 27.0%, 4위 김종필 8.1%로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이 되었다. 4대 주요 후보의 치열한 신문 광고 헤드라인이 흥미진진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의 신문 광고

지난 6월 29일 노태우의 민주화 선언으로 이미, 군정 시비는 끝났습니다. (노태우)

누구입니까? 29년 군정찌꺼기를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사람은... (김영삼)

“88년 봄, 대한민국.”(김대중)

“우리는 왜 김종필을 선택했나!!”(김종필)

 

고도의 경제 발전과 경이적인 광고비 성장 노태우 정권 5년간의 경제는 놀라우리만큼 성장했는데 연간 평균 GDP 성장률은 두 자리에 가까웠고 국민 1인당 소득은 1988년 324만 원에서 1992년 588만 원으로 81%나 성장했다. 광고비는 이러한 경제성장을 훨씬 앞질러서 88 서울 올림픽의 해는 처음으로 1조 원을 초과했으며, GDP 대비 광고비는 0.93%로 1%대에 바싹 다가갔다. 88년의 광고비 1조 2,785억 원은 1992년에 2조 8,158억 원으로 껑충 뛰어올라서 120% 성장했다. 환율 변동을 고려해도 미 달러로 환산하면 $18.7억 달러에서 $35.7억 달러로 증가했다.

자료: "한국통계연감" 2008. 712,713쪽. 1988~1994년 GDP 성장률을 "통계로 본 한국의 발자취" 1995, 통계청 311쪽
2017년 광고계 집계 기준 변경에 따라 총광고비 조정 (2014년까지 소급 적용), 자료 : 한국은행 경제지표통계시스템

개방과 정기간행물 그리고 광고/PR 단체 창립 및 한국 광고시장 개방 표현 자유화는 지난 4반세기 동안 억제되어 온 신문과 잡지 등 정기 간행물의 개방으로 나타났다. 87년에 30개이던 일간신문의 수는 93년에 이르러서 112개로 증가했고 정기간행물 총수는 2,412에서 7,867로 3배 넘게 폭증했다. 하루 12면으로 제한되어 있던 1일 발행면수는 90년에 24면 그 이후는 완전 자유화되었다. 발행 면수의 증가뿐 아니라 기사 내용은 상상을 넘을 만큼 자유화되었다.

자료 : 공보처, 문화관광부
자료 : 공보처, 문화관광부

81년에 공영화라는 미명 하에 모든 민간방송이 사라졌던 것이 91년에는 드디어 SBS 민간 상업방송의 창립으로 공민영 제도로 복귀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인 듯했다. 미국 측의 강력한 요구에서 시작된 한국 광고시장 개방은 1987년에 부분 개방 그리고 1991년에 완전 개방으로 바뀌었다.

각종 광고, PR 관련 단체들이 창립되었는데 한국광고주협회(88), 광고판촉물 제작협의회(88), 국제PR협회 한국지부(88), 한국ABC협회(89), 한국PR협회(89), 한국광고학회(89), 광고자율심의기구(91), 한국 여론•시장조사협회(92)의 8개 단체였다. 주목할 일 가운에 하나는 신문이 폭증하고 발행 면수가 자유로워지자 광고매체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신문 발행 부수 조사 기구가 한국ABC협회가 탄생한 일이었다. TV 시청률 조사는 91년에 SBS가 창립되면서 그 무렵에 가장 앞선 개인 시청률 조사 제도인 피플미터(PopleMeter)를 도입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광고 표현의 변화 개방은 보도의 자유 못지않게 광고 표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전 때 퇴역 육해공군 장성들이 신문에 게재한 “안보를 빙자하여 군정 연장 획책 마라!”라는 정치광고였다. 이 밖에도 과거에는 생각도 못 하던 기업의 대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요구 광고가 대두했다. 노태우 정권 다음 김영삼 정권 시대인 1994년에는 한국 광고 역사상 최초로 남녀 나체 광고가 신문에 등장할 만큼 표현 자유의 영역이 확산하였다. 이 밖에도 광고에 일어난 변화는 엄청나게 많았다.

1987년 6월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은 광고/홍보 자유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죽음을 별세이든 사망이든 서거라고 하든 그것은 자유이다. 다만 지울 수 없는 사실, FACT는 노태우의 6•29선언은 이 나라를 군사독재로부터 개방된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었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