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크리스마스 씰을 한국에 도입한 캐나다 선교사 이야기

[신인섭 칼럼] 크리스마스 씰을 한국에 도입한 캐나다 선교사 이야기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1.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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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876년 강화조약으로 한국은 일본과 수교하고 개항했다. 약 500년 동방 은둔의 나라 조선의 문이 열렸다. 145년 전이었다.

1882년, 개항 6년 뒤 미국, 영국, 독일과 수교하고, 다음 해에 미국 공사가 부임했다.

1885년 연초에는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미국 의사 알렌이 인천에 도착했다. 많은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1866년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셔만호가 불에 타 침몰하고 이 배에 탔던 선교사가 성경책을 가지고 배에서 뛰어내려 순교 당한 기억이 생생하던 때인데, 이번에는 다른 선교사/의사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셔우드와 마리안 홀 부부. 최초 덴마크의 씰
셔우드와 메리언 홀 부부. 최초 덴마크의 씰

1891년에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 윌리엄 J. 홀(Hall)이 서울을 거처 평양에 왔다. 1000리 길 동료와 한국인 도움으로 평양에 도착했지만, 범법자로 잡혀 들어갔다다. 서울에 있는 선교 본부와 한국 정부의 협의로 풀려났다. 의료 선교사 홀은 188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부상당한 조선 군인과 민간인을 치료하고 도왔다. 그리고 나자, 조선의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1894년 대동강가 병원에서 조선의 부상 군인을 치료하던 중 걸린 발진티푸스로 1894년 서울로 갔으나,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윌리엄 홀은 뉴욕 병원에서 일할 때 알게 된 로제타와 의료 선교 봉사를 위해 한국 서울에 도착한 뒤 결혼했고, 한국에서 아들 셔우드(Sherwood)를 낳았다. (딸은 세 살 때 죽었다.)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함께 일시 귀국했던 부인 로제타는 1897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평양에서 남편을 기념하는 병원을 세우고 의료 봉사와 여성 교육을 했으며 맹인을 위한 점자책을 한글로 만들었다. 40여 년을 한국에서 의료, 교육 선교 일을 했다.

로제타 홀(우측).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및 어려서 사망한 딸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및 어려서 사망한 딸, 로제타 홀 (오른쪽)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1.10~1991.4.5) 역시 부모의 대를 이어 의료 선교사로 평양에 왔다. 한국에 오기 전 캐나다 토론토에서 의사가 된 그는 역시 의사인 메리언(Marian)과 함께 1926년에 해주로 왔다. 그리고 1932년에 (현재는 이북인 황해도) 해주구세요양원(海州救世療養院)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시작했다. 

남대문 그림이 있는 1932년 최초의 씰과 김기창 화백이 그린 1937-38년 씰
남대문 그림이 있는 1932년 최초의 씰과 김기창 화백이 그린 1937-38년 씰
홀이 처음에 제작했다가 허가를 받지 못한 거북선 그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장의 씰 도안, '닥터 홀의 조선회사'에 수록된 도안 (왼쪽부터)

처음 고안한 그림은 한국 사람들이 숭앙하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그림으로 했는데, 일본 당국의 거부로 남대문으로 바꾸었다. 바꾸게 한 이유는 뻔했다. (이 거북선 디자인은 지금 캐나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첫 번째 씰은 모두 3만 5천 장을 발행했으며 수입은 850엔(圓)이었다. 씰 한 장당 가격은 1전(錢)이었다. 1932년 일본 850엔은 현재 한국 돈 3억여 원쯤이다. 그 뒤 크리스마스 씰 발행은 1940년까지 9번 계속됐다. 1940년에는 셔우드 홀 박사가 일본 당국의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고 풀려난 뒤 이듬해에 인도로 가서 결핵 업무를 보게 되었다. 1940년의 씰은 그림과 같은데 연도 표시가 당시 일본 소화(昭和) 연도가 아니라 1940~1941년이란 서양 연도였기 때문에 이것이 당국의 비위에 거슬려 빼고 제9번 째 씰이라는 의미로 "NINTH YEAR"로 고쳐야 했다. 그리고 영문 제목도 Christmas란 말은 빠지고 HOLIDAY GREETINGS로 바뀌었다.

1940년 원안과  서기 연도 “1940-1941”이 제거되고“NINTH YEAR"로 바뀐 씰
1940년 원안과 서기 연도 “1940-1941”이 제거되고“NINTH YEAR"로 바뀐 씰

모든 씰의 소재는 한국 전통문화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1937~1938년 씰인데, 이 도안은 당시 떠오르는 청년 화가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화백의 작품으로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평양 대동문을 배경으로 얼어붙은 대동강에서 팽이 놀이를 하는 두 어린이와 애를 업고 구경하고 있는 소녀의 그림이다.

첫해 3만 5천 장의 씰 판매로 모은 돈은 850엔이었다. 1932년 일본 엔과 달러의 환율을 지금 달러 가치를 감안하면, 이 850엔은 지금 원화로 3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1940년 그는 간첩으로 재판을 받고 풀려나서 인도로 가서 폐병 관련 의료 업무를 하다가 1963년 은퇴 후 캐나다 밴쿠버에서 별세했다. 1992년 4월 10일 부모와 가족이 묻힌 서울 양화진 외국 선교사 묘지에 묻혔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부활한 1953년의 대한결핵협회가 발행한 씰은 그림과 같다.

1953년 크리스마스 씰

1904년 덴마크에서 시작되고 1932년 셔우드 홀 박사가 한국에 옮겨 심은 씨는 열매를 맺어서 대한 결핵협회가 매년 뜻깊은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사람은 갔지만, 홀 일가의 뼈는 서울 양화진 외국 선교사 모지에 묻혀 있다.

셔우드 홀의 공적비와 그의 부모 묘비 (출처 다음블로그 KCM의 문화광장)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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