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PR이란 말은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나?

[신인섭 칼럼] PR이란 말은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나?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19.07.31 15: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미지 셔터스톡
이미지 셔터스톡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 독립 후 우리나라에 새로운 말들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우선 해방 후 남북으로 갈라진 남한에는 미군 진주와 함께 할로(Hello). 오케이(OK), 미스터(Mr), 닥터(Dr) 따위 말이 등장했다. 북한에는 따와리씨(동무), 까레이스키 마담(조선 여성)이 등장했다. 까레이스키 마담이란 말은 평양 최대의 시장 신창리 시장에서 물건을 사던 러시아 군인들이 한국 아주머니를 부르는 통칭이었다.

Public Relations라는 말이 나오는 OCI 문서 표지
Public Relations라는 말이 나오는 OCI 문서 표지
OCI 기록이 니오는 국사편찬위원회 문서 표지
OCI 기록이 니오는 국사편찬위원회 문서 표지

PR이란 말도 새로 생긴 말 가운데 하나였다. 학문 용어인 PR이란 낱말이 정확히 언제부터 우리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문서로 나타나는 것은 아직 미군정 시대(1945-1948)인 1947년에 나온다. 주둔한 미군과 미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한국 국민에게 홍보하기 위해 1947년에는 주한 미24군단장 직속으로 민간공보처(Office of Civil Information. OCI)가 설립되었는데, 이와 관련된 문서에 처음으로 Public Relations라는 낱말이 등장한다. 일제시대에는 PR이란 말은 한국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해방 전 1930년대에 미국 책 번역 등을 통해 극히 일부에게는 PR이란 말이 알려져 있었었으나, 일반으로 퍼진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군이 진주한 1945년 8얼 일본의 패전 이후였다.

OCI 조직도 (영문)
OCI 조직도 (영문)

OCI는 비록 군 조직의 일부이기는 했으나, 책임자는 문관이었고 현역 군인은 보조하는 자리에 있었다. 모두 113명이었는데, 미국인은 문관이 24명, 현역 장교가 3명, 사병이 10명으로 모두 37명이었고 나머지 76명은 한국인이었다. 조직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는 일은 사실상 민간 PR회사가 하는 일과 같았다. 다만 하는 일에 따라 호칭이 다를 뿐이었다. 이 문서가 공개된 것은 비밀해제된 미24군단의 G-2 (정보과) 역사반의 기록이 우리나라 역사편찬위원회에 입수된 2000년대의 일이었다.

OCI 책임자인 스튜어트
OCI 책임자인 스튜어트

흥미있는 사실은 OCI의 책임자였던 제임스 L. 스튜어트 (James L. Stewart) 처장은 문관으로서 원래 신문기자였고 태평양전쟁이 일아난 뒤에는 중국 중경(重慶)에서 홍보 업무를 하다가 한국으로 전근되어 온 사람이었다. 스튜어트는 원래 일본 코베시에 나와 있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일본과 아시아 상황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제1회 국민 여론조사 보고서 표지
제1회 국민 여론조사 보고서 표지

Public Relations (PR)이란 낱말이 공개된 것은 그림에서 보는 문서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했듯이 1947년에 창설된 임시 기구인 OCI는 대한국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해체되었고, 아마도 거기에서 근무하던 한국인은 공보처로 옯겼을 것이다. 따라서 PR이란 말은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1960년 4.19학생혁명으로 붕괴한 이승만 정권 뒤에 민주당 정권이 등장하면서 이 해 11월에는 제1회국민여론조사 결과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모름지기 이 업무는 OCI에서 근무하던 한국인이 참여했을 것이다. OCI 책임자 스튜어트는 한국 정부 공보처 고문이기도 했다.

미국 공보원 발행 문화, 풍속 잡지
미국 공보원 발행 문화, 풍속 잡지

스튜어트는 OCI 해체 뒤에는 주한 미국 공보원장이 되었으며 한국 국민을 대상으로 많은 공보/홍보 및 문화활동을 했다. 그런 일 가운데 하나는 그가 창간한 문화, 풍속(文化, 風俗)이란 월간지가 있는데 이를 통해 미국을 홍보하는 일을 했다.

조선일보 196년 5월 2일 기사
조선일보 196년 5월 2일 기사

PR이란 말이 조선일보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60년 5월 20일 <계륵(鷄肋)>이란 칼럼에서 '이색(異色)PR'이란 말이 나온다. PR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대인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PR이란 말 대신 홍보라는 말의 빈도가 부쩍 증가하고 결국 홍보가 PR이란 마을 대체하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PR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데 그 원인의 하나는 PR이 하는 업무의 다양성에 있다. PR의 발전은 언론의 자유와 밀접히 관련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면 PR협회, PR회사와 PR학문 연구가 대두한 것은 1990년대로 그 시작은 1987년 88서울 올림픽과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여당 노태우 후보의 6.29선언이 나온 뒤였다. 즉 이 선언으로 정치의 자유와 더불어 언론의 자유가 꽃피기 시작한 뒤였다. 6.29선언으로 우리 나라 언론의 자유는 돌이킬 수 없는 개방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니 PR이란 한국의 언론 자유 나아가서는 한국이 개방 시대로 접어든 이 선언의 열매였다.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방대학원 초빙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