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드타임스 하인즈 베커 칼럼니스트] 나는 변덕이 심한 사람이다. 옷을 입는 것도 그렇다. 한 해는 청바지 만을 입고, 다음 해에는 넥타이를 맨다. 그렇게 수십년을 살았다. 내 변덕 덕분에 와이셔츠를 다려야 하는 분들의 노동이 늘었다. 성가신 일이 늘어난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블레이저와 슈트를 번갈아 입어야 하고, 어울리는 와이셔츠를 찾고, 그것에 맞는 넥타이를 고르느라 출근을 준비하는 시간이 두 배는 길어졌다. 그래. 어디 gorgeous 해지기가 쉬울까?
본격적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나에게 '남자는 자기 나이만큼의 셔츠와 넥타이가 있어야 한다.'라고 알려주신 우아한 사모님이 한 분 계셨다. 박**이라는 아주 유명한 시인의 부인이었다.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든 '퀼트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파리에서 만났다. 그 사모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샘터사의 기자로 취직한 지 1년쯤 된 딸과 여행을 왔었고, 나는 퐁네프 다리 위에서 말보로 레드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피자와 와인으로 저녁을 먹었다. 고작 스물 일고여덟 이었던 나는 '등단한 소설가 입네, 광고를 만들고 있네, 박 **시인의 시를 잘 알고 있네.'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나는 여비가 떨어진 가난한 배낭 여행자일 뿐이었기에 공짜 저녁을 얻어먹는 값을 한 것뿐이지만, 파리라는 도시는 언제나 사람을 소녀의 감성으로 만든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따님보다, 그 50대의 사모님이 내 이야기에 더 집중해 주셨고, 어쩐지 나를 신통하게 생각해 주셨다.
한 달쯤 후, 한국에 돌아와서 그 모녀를 다시 만났다. 그 사모님은 내게 "진태옥 언니 쇼에 갔다가 자기 주려고 특별히 하나 고른 거야. 호호호"라고 웃으시며 파란 넥타이를 선물해 주시면서 넌지시 자기 딸과 사귀어 보면 어떨까라고 물으셨다. 넥타이 덕분에 그 따님과 나는 한 번 따로 만나 저녁을 먹고, 그때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포켓볼을 쳤다. 당연히 나와 그녀는 서로에게 흥미가 없었으며 두 번째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듬해 1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며 시인이 되었고, 나는 5~6년 후에 그녀의 시집을 사서 읽었다. 정말 좋은 시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모님 덕분에 나는 셔츠와 넥타이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청바지에서 슈트를 바뀌입는 해가 되면 언제나 1년간 열지 않은 작은 방 옷장에서 셔츠와 넥타이를 다시 추슬렀다. 색이 바래 버린 셔츠를 버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래저래 모은 것이 어느덧 내 나이를 훌쩍 넘어 300개 이상이 된 넥타이는 하나도 버리지 못했다. 그 더미 속에서 아침마다 넥타이를 하나씩 고르며 생각나는 추억의 재미가 나쁘지 않다. '진태옥 넥타이'도 아직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나이가 먹을 수록 점점 예뻐진다.
그래. 모든 것이 어쩌면 '변덕' 덕분이다. 대체로 변덕이라는 단어는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지만, 크리에이터에게 변덕은 '꼭 필요한 자질'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상대해야 하는 대중이 매우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대중은 지루함을 참아내지 못하며, 무수한 미디어의 발명 덕분에 그 지루함을 참아내는 속도는 더 짧아지고 있다. 이제는 정말 소설책 한 권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호흡을 가진 대중을 찾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그러므로 대중은 나보다 더 변덕스럽다. 어제 성공한 기획이라도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쓰레기통에 집어던져야 한다. 지난밤 발견한 충격적인 아이디어라도, 오늘 아침에 다시 점검해야 하는 것이 크리에이터의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현역'들에겐 변덕스러운 봄이 또 시작되었다. 이제 은퇴한 나는 청바지도 슈트도 아닌, 카고 바지에 후드 달린 스포츠점퍼가 유니폼이 되었지만 당신들은 어울리는 옷, 잘 입기를 바란다. 큰 경쟁력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연말까지 목표를 지켜내기 위해서 매일매일 끝없는 변덕을 감당해야 한다.
겨우 넥타이 하나가 변덕스러운 내게, 참 많은 말을 한다.
하인즈 베커 Heinz Becker
스무 살때 영화 <비오는 날 수채화>의 카피와 광고를 담당한 이후, 30년 가까이 전 세계 광고회사를 떠돌며 Copy Writer, Creative Director, ECD, CCO로 살았다. 지휘한 캠페인 수백개, 성공한 캠페인 수십개, 쓴 책 3권, 영화가 된 책이 하나 있다. 2024년 자발적 은퇴 후, 브런치와 Medium에 한글과 영어로 다양한 글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Cosmopolitan. Writer. Advertising Creative Director. Created hundreds of advertising campaigns and written three books. One of them was made into a 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