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것들의 줄서기

요즘 것들의 줄서기

  • 송선아
  • 승인 2022.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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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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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노숙자들

샤넬·루이뷔통·구찌 등 명품 브랜드 매장이 모여 있는 청담동에서 6년 동안 자취생활을 했다. 힙한 브랜드와 매장들이 즐비한 동네인지라 유명한 식당이나 카페·편집숍 등을 집 앞 슈퍼 가듯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덕분에 트렌드를 빠르게 경험하는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청담동에서 길게 늘어진 줄을 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발렛 순서를 기다리는 자동차 줄부터 팬클럽 줄, 백화점 오픈런 등 다양한 줄서기를 봐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줄서기를 꼽으라면 바로 루이뷔통 매장 앞에서 캠핑노숙을 하던 사람들의 줄이 아닐까 싶다.

밤 12시가 다 된 시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평소와 달리 매우 소란스러웠다. 루이뷔통 매장 앞은 꽤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와 캠핑의자 등을 갖고 와서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광경이 매우 신기하고,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 할 행동이었다. 나중에 뉴스 기사를 통해 루이뷔통과 슈프림의 컬래레이션 컬렉션을 구매하기 위한 대기줄이라는 걸 알았고, 매장가의 2배 이상으로 제품이 리셀된다는 이야기에 그들의 밤샘 줄서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줄서기를 부르는 한정판, 정체성의 표현 수단이기도

줄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싫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또는 며칠 밤을 새면서까지 줄을 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는 사회가 됐다. 나의 정체성을 잘 표현해줄 수 있거나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만이 주목 받고 소비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하나의 트렌드로 ‘한정판(Limited Edition)’이 등장하게 됐다. 한정판은 타인이 소유하지 않은 것을 자신만이 소유했다는 심리적 우월감과 만족감을 선사한다. 또 제한된 수량·시간·장소라는 조건을 통해 상품의 희소성을 의식적으로 높여 소비자의 구매심리와 경쟁심을 자극한다. 한정판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스스로를 줄 세우는 것이다. 

한정판을 사는 사람들은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제품을 소유한다는 ‘특별함’ 때문에 지갑을 연다고 말한다. 그리고 요즘에는 SNS를 통해 그 영향력이 더 극대화될 수 있기에 한정판의 인기는 더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희귀 품목을 구하기 위해 발매 며칠 전부터 줄을 서는 문화는 미국·일본·유럽 등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줄서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2000년대 초 나이키 티파니덩크의 드롭(특정 요일이나 시간대를 정해 기습적으로 신제품을 판매하는 방식)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선 오직 80켤레만, 그것도 서울과 부산 매장에서만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판매 며칠 전부터 지방에서 올라온 운동화 마니아들은 3박 4일간 매장 앞에서 노숙생활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 다른 줄서기의 예로 ‘아더 스페이스’가 있다. 국내 브랜드인 ‘아더에러’의 플래그십스토어로, 실험적인 패션 아이템과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감각적인 전시를 하나의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핫플이다. 유행하는 아이템으로 한껏 멋을 낸 젊은 사람들이 매장 앞에 줄 서 있는 모습이 SNS를 통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매장 앞 줄은 더 길어지게 됐다.

덕후들의 줄서기

최근에는 16년 만에 재출시된 포켓몬스터 빵을 사기 위한 새로운 줄서기 풍경이 화제였다. 빵의 맛보다 그 안에 들어있는 띠부띠부씰 수집이 목적인 줄서기이다. 어린 아이를 대신해 나온 할머니와 엄마부터 포켓몬에 향수가 있는 MZ세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줄 세운 포켓몬빵의 인기는 3개월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명품이나 특정 제품 중심으로 이뤄지던 줄서기 풍경은 일정 분야의 덕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5월 홍대 부근 복합쇼핑몰 ‘AK&홍대’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1만 5000여 명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덕후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 것이다. 이들이 코로나를 뚫고 긴 줄을 선 것은 개장 3년 만에 재단장한 이 쇼핑몰의 5층을 통째로 서브 컬처·오타쿠층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이곳 오타쿠층에는 ‘원피스’ 애니메이션 상품점, 중고 피규어 리셀숍, 일본 최대 애니메이션 굿즈숍 등이 들어섰다. 이곳은 요즘도 주말이면 입장을 기다리는 긴 줄이 이어지며 애니 덕후들의 성지처럼 여겨진다. 

줄서는 것까지가 브랜드 경험이다

줄서기는 남들보다 특이한 경험을 먼저 하려는 소비자들의 심리와 줄을 서야 인기제품으로 인정받는 마케팅 요소가 맞물린 결과이다. 

과거에는 줄서기 현상을 두고 ‘전시효과’를 위해서 일부러 줄을 세운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강했다. 하지만 이제는 줄서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브랜드의 입장에선 줄서기가 비효율적인 운영의 결과가 아니라, 브랜드의 영향력을 판단하는 지표가 됐다. 그리고 소비자들에게는 유행에 동참하고 있다는 소속감과 만족감을 주는 행위이자 줄 서는 모습 자체를 ‘인증샷’이나 ‘영상 콘텐츠’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한다.

줄서기는 이제 더 이상 이해하지 못 할 현상이 아니다. 어르신부터 아이까지 모든 세대를 줄 세운 포켓몬빵 오픈런처럼, 줄서기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이자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송선아 맥켄에릭슨 카피라이터

※ 본 아티클은 한국광고산업협회 발간 <The Ad> 칼럼을 전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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