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시인 박두진 (朴斗鎭)의 말: “이젠 우리 시인들보다 당신들의 책임이 정말 더 크게 느껴지오. 영향력이 대단한 직업이오.”

[신인섭 칼럼] 시인 박두진 (朴斗鎭)의 말: “이젠 우리 시인들보다 당신들의 책임이 정말 더 크게 느껴지오. 영향력이 대단한 직업이오.”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3.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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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84년 2월 1일 "서울 풍경 6" 기사
조선일보 1984년 2월 1일 "서울 풍경 6" 기사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984년 2월 12일 조선일보 8면에는 큼직한 연재 기사 <서울 풍경(風景)> 6회째에 <카피라이터>가 실렸다. 기사 중간에는 <짧은 선전문자 창작... “고액 수입” 정신분석학 등 공부... 2백여명 활동 “광고 시대의 꽃”이란 소제목이 나온다. 윤호미 기자의 이 보도 가운데는 10년 전 시인 박두진이 대학교수로 있을 때 한 말 “이젠 우리 시인들보다 당신들의 책임이 정말 더 크게 느껴지오. 영향력이 대단한 직업이오”란 말이 나온다. 10년 전이라면 70년대 중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도 광고 카피라이터를 주요 일간신문이 이렇게 크게 다룬 일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 보도는 여러 카피이터를 만나 퍽 깊이 있게 그들이 하는 일 구석까지 파고든 보도이다.

SCC 창립 당시 회원 사진
SCC 창립 당시 회원 사진

1976년 7월 3일 옛 한국일보 빌딩 녹실에서는 한국 최초의 색다른 광고 단체가 탄생했다. 속된 말로 듣도 보도 못한 단체로 꿈은 컸으나 모임은 조촐했다. 스물한 명이 모였다. 현역 카피라이터, 카피와 광고에 종사하며 관심 있는 분, 그리고 전직 방송인, 신문기자 광고주나 광고회사에서 종사하는 분들이 모였다. 여성 두 분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은 뒤에 웰컴 광고회사를 공동 창립한 문애란 대표였다. 들리는 바로 문애란은 뒤에 나체 여성의 사진이 있는 화장품 회사의 광고를 일간 신문에 게재해 카피라이터란 “영향력이 대단한 직업”임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 창립 모임에는 여러 카피라이터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모임이 처음이었고 카피라이터란 말조차 생소했으며 이런 광고인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카피라터를 문안가(文案家)라 불렀고 디자이너는 도안가라 부르던 때였다. 누가 어디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던 때였다.

그런데 선각자란 어디나 있는 법일까? 그 가운데 한 분은 김태형(金泰亨. 사진과 명단, 회보 참조)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김태형은 한국에서 60년대 후반에 문안, 문안가, 카피, 카피라이터란 말을 맨 먼저 들고나온 분이다. 초대 창립회장은 신인섭, 나였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나보다는 연세가 위인 2대 회장 이낙운(李洛雲)이 내가 소개한 오길비의 <어느 광고인의 고백 (Confessions of An Advertising Man)>을 보고 나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대단한 열정의 카피라이터였다. 뒤에 “흔들어 주세요”를 들고나와 성공시킨 분이기도 하다. 그는 창립의 해 1976년 9월에는 무려 140페이지의 회보 <카피>를 출판할 만큼 활동하는 카피라이터였다. 또한 오길비의 <어느 광고인의 고백>을 번역, 소개한 사람이다. <카피 6>은 81년 4월 김태형 회장이 격월로 발행하는 회지가 되었고, 84년 7월에 나온 SCC 임시 회보에는 회장 이만재의 글이 실려 있다. 80년대 초에는 SCC 회원이 200명을 넘었다.

1976년 9월호 표지
"카피" 1976년 9월호 표지
"카피" 1981년 4월호 표지
"카피" 1981년 4월호 표지
1984년 7월 12일 임시 회보
1984년 7월 12일 임시 회보

창립 이듬해 ‘77년에는 내가 쓴 <광고(廣告Copywriting>이 출판되었다. 돈도 없고 이런 책 내겠다는 출판사가 있을 리도 없어 당시 광고협의회 김명하 회장이 광고 찬조를 얻어 출판했다. (내 원고료란 아예 생각에도 없었다.) 이 책은 그 뒤 다른 회사가 다시 재판으로 출판했다. <광고 Copywriting>은 단순한 광고 카피만의 책은 아니었다. 한국 최초로 여러 국제 광고제를 소개했을 뿐 아니라 카피를 중심으로 한 150권 가까운 주로 미국 광고 전문 서적을 소개했다. 특히 지금은 낯익어진 공익광고를 처음으로 사례를 들어 소개했는데,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공익광고를 시작하기 4년 전이었다. 이를테면 한국 광고산업의 관심과 연구의 시야를 처음으로 대한해협 넘어 태평양 건너로 확산했다. SCC는 그 뒤 자취를 감추었다. 서운한 일이었다.

신인섭의 "광고 Copywriting"
신인섭의 "광고 Copywriting"

연간 광고비가 100억 달러를 넘는 선진국 한국이라고는 하지만, 카피라이터즈 클럽이나 아트디렉터즈 클럽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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