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49년 전 서울대 신문대학원 김지자 교수가 본 한국의 PR, 그리고 오늘의 PR

[신인섭 칼럼] 49년 전 서울대 신문대학원 김지자 교수가 본 한국의 PR, 그리고 오늘의 PR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3.04.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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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자 교수의 글이 실린 1974년 5월 22일 조선일보
김지자 교수의 글이 실린 1974년 5월 22일 조선일보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50년 전 학자의 PR에 대한 의견은 어땠을까? 한국신문학회 74년 연구 발표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1974년 5월 22일 기사 “PR의 학문적 성격과 전문성”이라는 서울대 신문대학원 김지자 강사의 글이 있다. 김지자 교수의 글 가운데는 우리의 PR이 걸어온 길을 시사하는 일부를 인용한다.

학문적 입장에서 PR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태도, 의견에 영향을 주려는 계획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PR가 독립적 학문으로 자립하기에는 독자적인 이론 정립의 문제가 남아 있다. 학문적 현실에서 PR의 전문성은 거의 영(零)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PR가 신문방송학 커뮤니케이션학의 그늘에서 한 개의 파생된 응용 분야로 여겨지고 있다. 독립된 학문 분야로 성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PR를 전문적으로 택하고 있는 실천인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회 결성과 활동이 있어야 한다.

둘째. 대학에 PR 전공 학과 및 유사 연구 기관을 설립, 강화하여 독자적 이론 정립과 실증적 연구를 높여야 한다.

셋째. 현직 PR 전문인의 자질과 자격 기준을 높이고 정기적인 출판 활동이 이에 따라야 한다.

옳은 지적이다. ‘74년에 이런 글이 나온 뒤 거의 반세기 동안 우리의 PR이 걸어온 길을 살피면 알 수 있다. 몇 가지 더할 일이 있다. 이미 1960년대 초에 이화여대에서는 3학점 PR 과목 외에 공보 관련 과목도 있었다. 교수는 미주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윤희중이었다.

1960년 이화여대 신문학과 설립 당시 교과목 및 내용.
1960년 이화여대 신문학과 설립 당시 교과목 및 내용.

1974년에는 중앙대학교에 광보학과가 창설되었다. 광고와 PR을 전문으로 하는 4년제 대학 학과이다. 1966년에는 홍사중이 번역한 「PR원론」이 탐구당에서 출판되었다 (그림 2) 얼마나 팔렸으며 읽혔는가는 별개 문제이다. 커틀립과 센터(Cutlip & Center)가 공저해 1964년에 처음 출판된 이후, 이 책은 미국에서 가장 장기간 여러 대학에서 PR의 기초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한다. 그런 PR 전문 서적이 첫 출판 2년 뒤에 우리말로 옮겨졌다.

IPR 및 PR원론(原論(원론) 책 표지
IPR 및 PR원론(原論(원론) 책 표지

‘70년대 초에는 박정희 정권이 제창하고 실천한 수출 증대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김종필 총리가 제창해 “IPR”이란 국제 PR 조직이 탄생했다. IPR이란 International Public Relations, 즉 국제 PR이다. 재정 보전을 위해 수입은 정부 광고를 대행해서 생기는 수수료로 충당하도록 했다. 설립 방법의 잘잘못을 떠나 앞을 내가 본 일이었다. IPR 활동에 관한 기록도 찾지 못했다. 정부가 지원해서 발행한 New York Times 일요판 한국 특집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을 기해 시작한 이 국가 PR 특집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수만 달러가 투입되는 특집으로 70년대 초의 한국 경제를 고려하면 쉽지 않은 외화 지출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일에 IPR이 관련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PR 담당 회사 버슨 마스텔러를 제외하면 PR 전문회사는 ’80년대에 겨우 4개 사가 있었을 뿐이고 그 활동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1971년 New York Times 일요부록 한국특집 표지
1971년 New York Times 일요부록 한국특집 표지

한국의 현대적 PR 시작은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1987년 6•29선언으로 표현의 자유가 회복되고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무렵이다. 88서울올림픽은 한국에 PR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일대 전환기가 되었다. 공산권 국가와는 외교관계가 없으나 인류의 제전에는 초청해야 하는 처지였다. 서둘러 국제적인 경험과 네트워크를 가진 미국 PR회사 버슨 마스텔러의 서비스를 고용하게 되었다. PR의 필요가 생긴 것은 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뿐 아니라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한국의 여러 기업에도 다가왔다. 국제 광고와 PR의 경험이 부족한 한국 기업과 광고회사들은 앞다투어 미국 광고/PR회사와 업무 제휴를 서두르게 되었다. 87년에는 굳게 닫혀 있던 한국 광고/PR 시장이 부분 개방되어 외국 광고/PR회사 투자할 수 있게 됐다.

1989년에는 한국PR협회가 창설되었다. 최초로 미국 PR회사 버슨 마스텔러가 개업했다. 90년대에 접어들자 PR회사가 죽순처럼 증가했다. 여러 대학에는 광고홍보학과 설립 붐이 일어났다. 그리고 PR이 필수 연구 과목이 되었다. 1989년에는 한국PR협회가 출범했다. 한국홍보학회(뒤에 PR학회로 개칭)가 창립된 것은 1996년이었으니 김 교수의 이 글이 나온 22년 뒤였다. 2000년에는 PR화사 단체인 한국PR기업협회가 창설되었다. 2010년 5월에는 PR 전문 월간지가 탄생했다.

김 교수가 언급한 대로 "인간의 태도나 의견에 영향을 주려는 계획적인 커뮤니케이션"에 필수 불가결한 도구인 신문 잡지 등, 당시 가장 중요한 언론매체 발행의 자유가 없는 것이 70년대 한국의 상황이었다. 발행의 자유 못지않게 표현의 자유도 심한 규제 하에 있었다.

한국에 진정한 PR/홍보 시대가 제부터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 다음 표인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1920년에서 1999년 기간의 피알, PR, 홍보/弘報 세 낱말의 빈도를 검색한 표이다.

①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홍보란 말은 만주국 홍보 관련 기사이다. 그리고 동아일보의 경우는 1917년 소련 볼셰비키 혁명 진압과 관련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진주한 일본군 관련 보도가 포함되어 있다.

② PR이란 영어는 60년대 이후 줄곧 감소하고 있다. 또한 한글로 쓴 피알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③ 반면에 홍보란 말은 80년대에서 90년대로 바뀌면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물론 88 서울 올림픽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일간신문의 수와 발행면수 자유화로 폭증한 페이지의 수가 미친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 정부, 기타 공공기관, 민간 단체 등의 홍보 자료의 증가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④ 크게 보아서 90년대에 접어들자 홍보/PR이 무척 증가했으며 성숙한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역시 88올림픽 무렵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회복을 알 수 있다. PR/홍보란 역시 표현의 자유와 직결되어 있음이 나타난다.

조선, 동아일보의  피알, PR, 홍보(弘報) 검색 결과
조선, 동아일보의 피알, PR, 홍보(弘報) 검색 결과

2011년 4월 22일 AP 클럽이 창설되었는데, AP란 Advertising과 PR의 머리글을 딴 이름이었다. (1957년에 주로 20대 젊은 신문기자들이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갔다가 돌아와 창설한 단체인 관훈 클럽에서 힌트를 얻은 명칭이었을 것이다.) AP 클럽이란 은퇴한 광고, PR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이때 나는 이 AP Club 초대 김명하 회장의 요청으로 개회 연설을 했다. 연설 제목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광고와 PR이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로 했다.

남아 있는 자료를 보니 마지막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광고와 PR이 없는 사회는 민주 사회가 아닙니다. 광고와 PR이 없는 자유언론은 허구입니다. 그리고 자유 언론이 없는 민주주의는 허구입니다."

거의 반세기 전 서울대학 신문대학원 김지자 교수의 앞을 내다본 글을 보며 떠오른 이야기이다.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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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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