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한국의 모든 언론인들이 빚진 도서관 사서" 계훈모(桂勳模)

[신인섭 칼럼] "한국의 모든 언론인들이 빚진 도서관 사서" 계훈모(桂勳模)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3.03.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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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처음 만나 알게 된 계훈모 선생과 정진석 교수
1971년에 처음 만나 알게 된 계훈모 선생과 정진석 교수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이 글의 제목에 나오는 인용구는 한국 언론사의 살아 있는 역사가 “Historian Number One"인 정진석(鄭晉錫) 교수가 한 말이다. 그는 몇 해 전 외국어대학에서 은퇴했다. 정교수가 이런 말을 한 분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2003년 3월 25일에 85세로 돌아간 계훈모 선생이다. 계훈모 선생(이하 존칭 생략)에 대해 정교수가 한 말은 더 있다. ”책 잡지 신문의 수호자“의 첫 번째 인물이며, 또한 ”한국 언론 연표를 위해 태어난 애국자“라는 것이다.

계훈모의 출생지는 평안북도 선천이다. 천도교도인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재동보통학교(초등학교), 경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일본대학을 거쳐 1943년 일본 전수대학 전문부 경제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12년 동안 경성부와 동신직물에서 일했다. 1955년에서 1973년 55세로 은퇴할 때까지는 서울대학 중앙도서관에서 근무했다. 1959년 말에는 사서(司書)로 일했다. 2년 후인 1961년 그는 연세대학 부설 한국도서관학교 특수과정을 졸업했다. 그가 정식으로 사서가 된 것은 1966년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정식 사서 자격증 제도가 시작된 해였는데 계훈모는 제43호 정사서이다.

도서관 학교 특수과정 수료 증서 (1961)
도서관 학교 특수과정 수료 증서 (1961)
계훈모의 사서자격증
계훈모의 사서자격증

그는 사서로서보다 한국 언론사 편집자로서 더 알려져 있고 또한 “한국언론연표를 위해 태어난 애국자”로 이름 높은 사람이다. 계훈모의 연구로 1881년에서 1955년까지 75년 기간의 한국 언론의 발자취가 낱낱이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실로 초인적인 일을 혼자 해 낸 애국자이다. 그의 한국언론연표는 언론뿐 아니라 언론의 일부인 한국 광고사에도 필수적인 자료를 남겼다.

한국언론연표
한국언론연표

내가 쓴 <한국 광고 발달사(韓國廣告發達史)>는 고맙게도 1980년 일조각에서 출판했다. 그런데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개화기 한국에서 발행되던 신문과 잡지 현황. 신문의 면(面), 단(段), 단당 행수(줄의 수), 행당 글자의 수, 활자의 크기 그리고 그 변화 등이 고스란히 그의 언론 연표에 나와 있다. 아울러 연표에는 개화기 제국신문(帝國)新聞과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실린 광고 관련 논설이 수록되어 있다.

제1권에 나오는 개화기 광고 관련 기사 리스트
제1권에 나오는 개화기 광고 관련 기사 리스트
신인섭의 한국광고 발달사의 인명 색인
신인섭의 한국광고 발달사의 인명 색인

나아가서는 을사늑약 이듬해에 한국에 진출한 통신과 광고대행 겸임 회사인 일본전보통신사(日本電報通信社)에 관해 자상한 기록이 “III 일본의 광고대행사 전통(日本의 廣告代行社 電通)”에 나와 있다. 일본어로는 덴츠(Dentsu)로 이름을 바꾼 이 광고회사는 해방 전 한국의 언론과 광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회사이다. 그 영향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제1권에 수록된 일본의 광고대행사 덴츠(電通)
제1권에 수록된 일본의 광고대행사 덴츠(電通)

1979년에 출판된 한국언론연표 제1권 98페이지에는 광고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예를 들면 “광고•간판(廣告•看板)” 항의 기록에 있는 “매출 증진하는 광고 쓰는 방법 <전 4회>” 가운데 1회를 보고 찾은 기사가 있는데 1938년(소화 13년) 5월 20일 6면의 1단부터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제1권 98 페이지에 수록된 광고와 간판 항목 리스트
제1권 98 페이지에 수록된 광고와 간판 항목 리스트

소윈도용 광고 기구 (一) 누구나 사용 가증한 전광 뉴스식 싸인스크린의 문자 벨트 용법 38.  5.20(6)1

언론연표 기록에 따라서 찾은 동아일보 1938년(소화. 昭和 13년).5.20일 기사
언론연표 기록에 따라서 찾은 동아일보 1938년(소화. 昭和 13년).5.20일 기사

1970년대의 한국, 인터넷이나 프린터는 물론 복사기조차 손쉽지 않던 시절에 하나하나를 모두 수작업으로 하던 것을 생각하면, 그 고생은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참고로 한 오마이뉴스 2021년 7월 5일 보도에서 구본희 기자는 계훈모의 <한국언론연표> 작업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는 그 방면의 여러 학자들이 몇 해 동안 고생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신문이나 언론을 전공한 사람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큰 작업을 학계와는 상관도 없고 더욱이 언론에 종사해 본 경험도 없는 일개 사서 혼자의 힘을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구본희 기자는 “ ‘누군가가 할 일’이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혼자서 해 냈다”라고 했다.

계훈모가 한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해 보았자 돈이 생기는 일이 아니니까 나한테 왔다.” 위트 섞인 의미심장한 말이다.

한국의 언론사를 논할 때 빠뜨려서 안 될 두 사람이 있다. 한 분은 계훈모 선생, 그리고 이 글의 제목 “한국의 모든 언론인들이 빚진 도서관 사서”를 말한 정진석 교수이다. 이 글에서 정교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한다. 지금 살아 있는 한국 언론사의 Historian Number One이다.

계훈모 선생에게는 “한국의 모든 언론인” 다음에 “그리고 광고인들”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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