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면 더욱 오래간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면 더욱 오래간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4.04.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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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클 파크 (출처 위키피디아, 사진 Daniel Schwen)
오라클 파크 (출처 위키피디아, 사진 Daniel Schwen)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바람의 손자’ 이정후 선수가 올해부터 뛰는 미국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은 특색 있고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외야 관중석 너머로 자이언츠 출신의 전설인 윌리 맥코비의 이름을 딴 맥코비 만의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왼쪽 외야 관중석 뒤에는 센터 쪽으로 대형 코카콜라 병이 비스듬히 있고, 그 옆에는 따르는 코카콜라를 받으려는 듯 대형 야구 글러브 조형물이 있다. 코카콜라 병 안에는 미끄럼틀도 있고, 전광판으로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요트 선착장과 함께 바다가 연이어 나타나 마치 해변 놀이공원 같은 느낌을 준다.

AT&T 파크, 코카콜라 병과 글러브 (출처 위키피디아)
AT&T 파크, 코카콜라 병과 글러브 (출처 위키피디아)

2000년 전후하여 메이저리그 경기를 즐겨 본 사람이라면, 배리 본즈라는 불세출의 타자가 친 홈런공이 맥코비 만의 바닷물로 풍덩 빠지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1인승 카약을 탄 이들이 맥코비 만에서 혹시 홈런공이 날아올까 뜰채를 가지고 바다 위에서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우측 담을 넘어 바다에 빠지는 장외홈런을, 공이 물을 찰싹 때리며 물방울이 튄다고 해서 ‘스플래시 히트(splash hit)’라고 했다. 이제는 혹시라도 이정후 선수가 스플래시 히트를 칠까 기대하게 된, 그 구장의 이름이 ‘오라클 파크(Oracle Park)’이다. 그 동네인 실리콘밸리의 대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IT 기업인 오라클이 후원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배리 본즈가 한창 맥코비 만으로 홈런을 치던 시절의 구장 이름은 달랐다. 그때는 통신 회사의 이름을 따서 ‘퍼시픽 벨 파크(Pacific Bell Park)’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2000년 시즌부터 현재의 구장을 사용했는데, 이전 시즌까지는 시에서 남쪽 외곽으로 한참 떨어진 구장을 사용했다. 스마트폰에서 전화 기능을 뺀 개인용 디지털 기기였던 팜파일롯으로 유명했던 기업의 이름을 딴 ‘쓰리콤(3Com) 파크’라는 이름이 공식 명칭이었지만, 내가 알던 거의 모든 사람은 ‘캔들스틱 파크(Candlestick Park)’라고 불렀다. 중계방송 아나운서나 해설자들도 캔들스틱 파크라고 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뒤에 쓰리콤 파크라고 불편한 투로 붙이곤 했다. 1960년 이래로 쌓인 캔들스틱 파크의 역사를 지워버렸다고, 쓰리콤 기업에 대한 불평을 대놓고 하는 야구팬들도 꽤 있었다. 지금 보면 너무 헐값이지만, 당시로써는 꽤 큰 금액이었던 90만 달러로 명명권을 샀던 쓰리콤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명명권을 사서 자신의 이름을 붙일 때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돈을 쓰면서 욕을 살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간판은 쓰리콤 파크였지만 대부분이 계속 캔들스틱 파크라고 하던 곳을 떠나서 샌프란시스코가 퍼시픽 벨 파크로 왔지만, 그 이름도 4년밖에 가지 못했다. 2004년에서 2005년까지는 거대 통신업체로 떠오른 기업의 이름을 따서 ‘SBC(Southwestern Bell Communication) 파크’가 되었다. SBC는 2005년 통신 기업의 원조와도 같은 AT&T를 합병한다. 그리고는 피합병 기업이지만 지명도와 친숙도가 높은 브랜드 네임인 AT&T를 구장에 붙인다. 그래서 오라클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은 AT&T 파크가 되었다. 이렇게 자주 이름이 바뀌어서야 사람들에게 그 시설물과 위치한 공간이 랜드마크로서 자리를 잡겠는가.

명명권을 지니고 행사한 기업 자체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는 일도 있다. 르브론 제임스와 샤킬 오닐 같은 슈퍼스타가 뛰며 NBA 우승 세 차례를 하면서 명문 팀으로 떠오른 마이애미 히트는, 2021년에 그들의 홈구장 이름을 ‘FTX 아레나(Arena)’라고 바꾸었다. 가상자산거래소 기업이 그 명명권을 획득한 것이었다. 그런데 FTX 창립자이자 운영자가 사기 및 자금 세탁 혐의로 유죄를 받으며, 바로 1년 후에 그 간판을 내렸다. 새롭게 명명권을 딴 곳은 일반인들에게 너무 생소한 카세야(Kaseya)라는 IT 기업이었고, 당연하게 ‘카세야 아레나’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도 중계하는 이들이 경기장 이름 발음하는 걸 보면 어색한 느낌이 난다.

스포츠 외에 예술 공연 시설에도 기업이나 기부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예술의 전당에도 기업 이름을 붙인 홀들이 몇 군데 있다. 한국인에게도 꽤 알려진 뉴욕의 ‘에벌리 피셔 홀’은 무려 1억 달러를 기부한 저명한 음반 제작자의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 게펜 홀’이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이름을 회사 이름으로 내세우기 좋아했던 게펜은 계약에 ‘데이비드 게펜 홀’이란 이름은 어떤 경우에도 바꿀 수 없다는 조항을 넣었다.

미국의 통신 기업 이름을 따서 ‘버라이존(Verizon) 홀’이라고 불리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공연홀이 버라이존과의 후원 계약이 끝나면서 최근 새로운 이름을 가진다고 발표했다. 그 이면에 보기 드문 사연이 있었다. 오케스트라 후원회장도 10년 이상 지냈던 금융 부문 경영인이자 투자가인 리처드 월리라는 인물이 2,500만 달러의 후원금을 내면서, 홀의 명칭을 필라델피아 출신의 흑인 여성 알토인 매리언 앤더슨(Marian Anderson)의 이름을 따서 ‘매리언 앤더슨 홀’이라고 붙여 달라고 한 것이다. 리처드 월리와의 명명권 계약의 세부 조항은 모르겠으나, 그 어떤 기업이나 기부자의 이름이 붙은 것보다는 훨씬 오래가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음악뿐만 아니라 인권의 가치까지 담아낼 수 있었다. 드러내지 않을수록 오래가는 일종의 반전이다.

버라이즌 홀과 매리언 앤더슨 (출처 symphony.org)
버라이즌 홀과 매리언 앤더슨 (출처 symphony.org)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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