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갱스터가 하는 페인트칠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갱스터가 하는 페인트칠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12.09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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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리시맨 The Irish Man>을 보았다. 네 명의 70대 영화계 거물들이 만나서 제작한 영화라는데, 상영관이 그리 많지 않았다. 상영 횟수나 시간도 맞추기가 힘들었다. 예술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시내의 영화관에서 그나마 자주 하는 편이었다. 마침 그 영화관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친구가 초대권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결국 영화관에서 관람하지 못하고, 집에서 아이패드로 넷플릭스에 접속하여 영화를 보았다. 일주일 동안 영화관에서 상영한 후에 바로 넷플릭스로 푼다는 유례없는 공개 상영 방식을 넷플릭스는 선보였다. 영화관에서 먼저 개봉하고, 보통 상영이 끝난 후에야 VOD나 넷플릭스와 같은 구독 서비스 채널로 풀리는 일직선적 방식이 여러 채널이 한꺼번에 어울리는 그물망 방식으로 바뀌어가는 사례를 만들었다.

<I Heard You Paint Houses>란 제목으로 2004년에 나온 논픽션 책이 영화의 원본 소재가 되었다. 그대로 번역하면 ‘당신이 집에 페이트칠을 한다고 들었는데요’ 정도가 될 텐데, 영화의 소재가 될만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영화의 서두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열연한 주인공 프랭크 시런이 양로원에서 앉아서 회고, 증언조로 하는 보이스오버(voice-over)의 첫 마디로 나온다.

When I was young, I thought house painters painted houses. What did I know?

(어릴 때 난 페인트공이 집을 칠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 내가 뭘 알았겠나?)

‘집에 페인트를 칠하다(paint houses)’는 미국 갱들 사이에서 쓰는 속어로 살인, 그 중에서도 청부살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주로 총을 써서 살인을 하면서 벽이나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묻는 게 흡사 페인트칠하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한단다. 살인이라는 행위의 야만성이나 잔인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걸 피하고자 또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계속 그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그 용어를 제대로 알고, 직접 갱단의 멤버로 페인트칠을 하게 되었을 때의 뿌듯함이 보이스오버에서 이렇게 이어진다.

I was a working guy, a business agent for Teamster Local 107 out of South Philly. One of a thousand working stiffs, until I wasn’t no more. And then I started painting houses myself.

(난 노동자였어. 필라델피아 남부 트럭 노조 107지부의 교섭위원이었지. 일개 근로자 중 하나였어. 오래 가진 않았지만. 그러다가 페인트칠을 시작했지. 내 손으로.)

원본 책의 제목은 알 파치노가 분한 지미 호파가 프랭크 시런을 처음 만났을 때 건넨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막강한 힘을 가졌던 트럭노조를 ‘나의 노조(my union)’이라고 하는 위원장으로서의 권위를 지미 호파가 갖고 있으나, 이렇게 갱단의 용어를 쓰면서 상대방에게 갖는 효과가 있다.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라는 경고 신호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당신과 같은 세계의 사람이다’라는 친밀감과 유대감이다. 기업들이나 특정 업종에서 그들만의 용어를 쓰는 경우가 꽤 있다. 이런 비밀 유지, 전문성 과시, 유대감 강화 등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개발하고 사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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