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자

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자

  • 이창호
  • 승인 2021.09.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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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써야 하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책장에서 수필의 대가이신 이태준의 책을 뒤적거려 봤습니다. 집에 이태준의 책이 두 권 있더군요. 하나는 두서없이 쓴 글이라는 뜻의 ‘무서록’, 그리고 또 하나는 카피라이터라면 응당 봐야 한다고 전해지는(아니면 적어도 소장이라도 해야 한다는) ‘문장강화’입니다. 두 권의 책 중 두 번째 책인 ‘문장강화’를 다시 펼쳐 봤습니다. 읽은 지 오래된 책을 다시 펼쳐 보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내가 여기에 밑줄을 왜 쳐 놨지?’ 하는 생각이 드는 밑줄들이 매우 많은 가운데… ‘아!’ 하는 밑줄(심지어 별표까지 그려놓은)이 하나 눈에 띄더군요. 

수필은 심적 나체(裸體)와 같다. 수필을 쓰려면 먼저 ‘자기풍부’가 있어야 하고 ‘자기의 미(美)’가 있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물에 부딪히든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 이건 그야말로 문장과의 진검승부며 따라서 수필이야말로 명필가의 자질을 필요로 하는 장르다. 

안 그래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자기풍부에 자기의 미까지 있어야 한다니… 더 어려워진 너낌적인 너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수필은 심적으로 나체인 상태로 솔직한 마음을 글로 적으면 된다는 것. 그럼 어디 한 번 홀딱 벗고 나체로 글을 써볼까?

솔직히 프랭클리 스피킹 하자면

그랬었었었었습니다. 카피라이터 사원 시절에는 이렇게 쓰면 씨디님이 좋아하실까? (웃으셨지만 좋아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대리, 차장 시절에는 이렇게 하면 기획팀에 팔릴까? (A안만 팔리고, B안은 디벨롭에, C안은 신규개발) 카피 부장이 되고 어쩌다 씨디까지 된 지금도 가끔은 요렇게 하면 광고주가 좋아할까? 피티가 될까? 쩜쩜쩜. 누군가에게 뭔가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지난 15년 동안 끝없이 나를 괴롭혀온 고민 오브 더 고민은 바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그들이 좋아해 줄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만드는 아이디어의 진짜 소비자는 씨디도 기획도 본부장도 대표도 광고주도 아닌 ‘소비자’인데, 너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거 아닐까? 아니, 애초에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크리에이티브라는 게 존재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이어지면서 현타에 빠져버렸….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있던 저에게 두 곡의 노래가 희망의 가사를 들려주었습니다.

신해철이 부릅니다. ‘절망에 관하여’

고등학교 시절 테이프 늘어지게 듣던 앨범인 NEXT의 명곡 중 하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인생의 모든 사건은 대부분 갑자기와 어쩌다보니로 이뤄지죠) 이 노래가 다시 듣고 싶어졌는데요. 다시 들어보니 그때는 느낄 수 없었던 울림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절규하면서 두 번 반복되는 마지막 가사, ‘그냥 가보는 거야~’ 여기서 무릎을 탁! “맞아. 크리에이티브도 인생처럼 그냥 가보는 거지”라는 생각이 번뜩 들더군요. 노래 제목은 ‘절망에 관하여’인데 거기서 저는 희망을 느꼈으니, 거참 아이러니합니다.

뜨겁던 내 심장은 날이 갈수록 식어 가는데 내 등 뒤엔 유령들처럼 옛꿈들이 날 원망하며 서 있네.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자욱씩 떼어 놓지만 갈 곳도 해야 할 것도 또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눈물 흘리며 몸부림치며 어쨌든 사는 날까지 살고 싶어. 그러다 보면 늙고 병들어 쓰러질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냥 가보는 거야 그냥 가보는 거야~(후략)

오지은이 부릅니다. ‘인생론’

두 번째 희망의 노래. 이 노래는 완전 두괄식, 첫 줄이 헤드라인인데요. ‘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이 별거 아닌 것 같은 한 마디가 저에게는 막힌 혈을 뚫어주는 한 줄이었습니다. 묶여있는 매듭을 ‘푸는’ 것보다 ‘끊는’게 더 쉽다는 걸 보여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가사를 듣는 순간 꽉 묶여있던 마음이 탁! 하고 풀리는 느낌을 받았죠. 아마도 그때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피티를 꼭 따오길 바라시는 대표님의 눈동자’로부터, ‘대박 쩌는 아이디어 나왔겠지? 라고 기대하는 기획팀의 기대’로부터, ‘우리의 아이디어를 그들이 좋아해 줄까?’라는 걱정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으로부터 말이죠.

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어차피 완벽히는 할 수 없으니, 요만큼만 뻥튀기는 하지 말자. 그냥 나의 몸집대로 아는 만큼만 말하고 모르는 건 배우면 되지. 최선을 다하면은 화창한 아침 도망만 다닌다면 어두운 아침 응원가는 싫지만, 응원은 해주 길 바래. 나같이 작고도 하찮은 게 혹시나 도움이 된다면 그 이상 기쁨이 없겠어요. 어차피 한가한 나니까 당신과 함께 있는 때라면 최대한 상냥하게 있겠어요.(후략)

Dive into Diversity!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렇게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어쩌라고, 뭐 어때, 아니면 말고, 알게 뭐람, 이렇게 마음대로 살다 보니 저와 비슷한 클라이언트를 만나게 됐습니다. 크래프트 맥주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에서 수제 맥주의 다양화와 대중화를 꿈꾸는 제주맥주! 기존 맥주 광고의 클리셰 문법으로부터 자유롭게, 제주맥주만의 브랜드 세계관을 보여줄 수 있는 광고를 만들고 싶은 클라이언트의 남다른 의지(라고 쓰고 ‘쪼’라고 읽는다)를 우리 팀만의 쪼대로 해석해서 제주맥주의 ‘Dive into Diversity’ 캠페인이 탄생했죠. (갑자기 분위기 내가 만든 광고 죄송합니다.) 크리에이티브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일단 새롭지 않나요? 아닌가요? 아님 말고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처럼, 인생의 정답이 하나가 아닌 것처럼 광고의 정답도 하나가 아니니까! 각자의 쪼대로, 각자의 크리에이티브 속으로 Dive into Diversity!

 


 이창호 CD TBWA KOREA 

※ 본 아티클은 한국광고총연합회 발간 <ADZ> 칼럼을 전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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