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시대의 소비인류, 그리고 광고기획자

시뮬라시옹 시대의 소비인류, 그리고 광고기획자

  • 유안드레아
  • 승인 2021.11.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상을 현실로, 현실을 가상으로 만드는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SF 영화의 신기원을 이룬 「매트릭스(The Matrix)」가 최근 새로운 속편 개봉을 예고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첫 개봉한 「매트릭스」 시리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실은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이며, 인류는 인간의 지능을 훌쩍 뛰어넘은 인공지능에 의해 지배받고 있으나 극소수의 깨어있는 사람들만이 그 실체를 알고 있는 암울한 219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네오는 반(反) 매트릭스 조직의 리더 모피어스가 건네준 빨간약을 집어삼킴으로써 매트릭스 프로그램에서 탈출해 진짜 세상을 ‘인식’하게 되며, 그때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힘겨운 모험을 시작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입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의 일상과 소비 생활이 전반이 디지털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역시 디지털 공간을 중심으로 재편되어버린 인류 역사 이래 디지털과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현시점에 매트릭스 시리즈 신작 개봉이 지니는 의미 역시 남다르다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2021년은 2199년의 매트릭스가 프로그래밍 되기 시작한 원년쯤 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상의 공간과 디지털 시대, 실재란 무엇인가?

지난 6월, 메타버스 플랫폼 ‘로블록스’에서는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구찌의 디지털 가방이 무려 4155달러, 한화로 약 460만원이 넘는 금액에 판매가 되었습니다. 만져볼 수도, 들어 볼 수도 없는 0과 1의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 명품 핸드백의 가치가 현실 세계의 그것에 버금가게 책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거래까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우리 인류가 수천 년 간 견지해 온 인지 체계에 거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실재(實在)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구찌가 로블록스 플랫폼에서 한정판으로 판매한 ‘구찌 퀸 비 디오니소스’ 가방. 약 4155달러에 거래되었는데 이 가격은 현실의 실제 가방 가격 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알려졌다.

이 에피소드는 영화 매트릭스 1편 중 한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인간 사냥꾼 스미스 요원의 오랜 협박과 회유에 굴복한 저항군의 일원 사이퍼는 매트릭스 세계에서의 부귀영화를 약속받고 동료들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스미스 요원과 함께 (매트릭스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가상의) 최고급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두툼한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확실히 나는 이것(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이 가짜라는 걸 알죠. 내가 이것을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뇌에 이것이 맛있고 육즙이 많다는 걸 느끼게 해주죠. (저항군 활동을 한 지) 9년 만에 깨달은 게 뭔지 알아요?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거죠.”

오랜 지하 활동에 지친 그는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뇌에서 일어나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상의 세계가 생생한 ‘진짜’ 현실과 다를 바 없고 심지어 현실의 그것보다 낫다면 가상이라고 하여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명품 브랜드 소유의 의미가 물성적 가치가 아닌 ‘타인이 인식하는 자기 이미지의 소유’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데이터에 불과한 디지털 핸드백이 일견 어처구니없는 고가에 거래된다 하여도 그 가치 교환의 매커니즘은 오프라인 현실에서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은 비단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화된 세상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가상의 이미지들은 물성적 실체를 대신해 새로운 가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철학적 딜레마를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그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 실체와 이미지의 경계, 원본과 복제의 경계,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를 예견합니다. 그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미지에 의해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라고 지적합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러한 ‘시뮬라크르’ 개념에 그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실체와 그 복제인 이미지의 경계가 사라진 사회가 도래했을 때 우리는 과연 그 둘을 구분해 낼 수 있을까요? 인간 인지 체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도화된 이미지의 세계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에 부여되는 가치는 과연 어떻게 매겨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종국에는 이런 질문마저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지만으로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요?“

 

원본을 압도하는 이미지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없애는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술 혁신’입니다. 이를테면, 영화의 CG 기술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실사와 구분이 분명했습니다. 소위 ‘티’가 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려한 시각 효과에 감동하거나 충격을 받으면서도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미지라는 경계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플롯의 참신함과 내러티브의 정교함, 즉 메타포적 상상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술은 해를 거듭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계속하였고 이제는 우리의 인지 능력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원본을 압도하는 복사물(이미지)의 세상, 즉 하이퍼리얼(hyper-real)의 세상으로 이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을 지극히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세계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SNS에서 열렬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그 단편적인 예입니다.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릴 미켈라(Lil Miquela)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300만 명이 넘고, 명실상부한 셀레브리티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작년 한 해에만 1,0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 어떤 업종보다 광고모델 발탁에 까다로운 프라다, 루이뷔통 등 명품 패션 브랜드들이 MZ 세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앞다투어 협업을 제안할 정도입니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ROZY)’는 최근 신한라이프 광고 모델로 발탁되어 디지털 채널은 물론 전통적 대중 매체인 공중파 TV 광고에도 데뷔하는 등 실제 인기 연예인 만큼이나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버추얼 뮤지션으로 혜성 같이 등장한 김래아 역시 LG전자의 앰배서더로 활약 중입니다. CES 2021에서는 LG전자의 기조연설자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국내최초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 그녀의 일상을 담은 모습이 공개되어 있는 인스타그램을 보고 가상의 인물임을 알아차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같은 버추얼 인플루언서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제작사 측에서 가상 인물이라는 것을 밝히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들이 실존 인물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외모는 물론 디테일한 피부 톤까지 실제 사람과 구분이 거의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2021년 현재 현실과 가상의 중첩 지대를 가장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이들 버추얼 인플루언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데 ‘가상 셀레브리티’라는 시도 자체는 사실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40대 이상의 광고인이라면 지난 세기말을 풍미했던 ‘사이버 가수 아담’의 존재를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아담이 처음 데뷔한 90년대 말 당시로서는 꽤나 고도화된 3D 그래픽 기술을 활용해 (지금 보면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그럭저럭 자연스러운 동작 구현과 구술이 가능했습니다. 데뷔 앨범이 히트를 쳤고 덕분에 음료 CF 모델로 발탁되어 TV 광고를 찍는 등 나름의 활약을 펼쳤습니다만 아담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인격이 부여된 ‘사람’임을 내세웠지만 당시 기술로는 아담이 3D 그래픽으로 제작된 가상의 캐릭터임을 누구라도 쉽게 인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가상과 현실의 중첩 지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컴퓨터 화면 속 가상의 세계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담은 어디까지나 사람인’척’하는 은유적(metaphoric) 복제물에 불과했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버추얼 인플루언서라는 존재는 드디어 가상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 세계와의 모호한 중첩 지대에 서서 새로운 비상의 날개를 달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우리 삶의 또 다른 터전인 디지털 공간에서 더 많은 가상의 인플루언서들에 둘러싸여 그들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열광했던 셀레브리티라는 존재가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미디어에 상에서 보이는 그 사람의 기획된 ‘이미지’임을 상기해 본다면 버추얼 인플루언서라고 해서 본질이 다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PC 게임 내에서 삶의 공간인 ‘척’했던 심즈(Sims)와 같은 소위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의 요소가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진화한 것 역시 위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이 역시 향후 십 수 년 내 기술적 진화를 거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가상과 현실의 구분조차 없어지는 초 고도화된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진화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대한 기술 발전의 흐름은 비단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의 다방면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쯤에서 우리는 앞서 제기했던 질문을 다시금 던져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미지만으로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가?”

 

시뮬라시옹 시대의 소비 인류와 광고 기획자

끝으로 고민해 볼 문제는 시뮬라시옹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 소비 인류를 대하는 우리 광고 기획자들의 대응입니다. 미학자 진중권은 그의 저서 「이미지 인문학」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상상과 이성, 허구와 사실, 환상과 실재 사이의 단절을 봉합선없이 이어준다”라고 주장하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바로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를 자유롭게 창조해 나가며 그 모호한 경계에 서서 자유롭게 양측을 오갈 수 있는 상상력, 소위 파타포적 상상력이 그것입니다. ‘파타포(pataphor)’는 엉뚱한 상상력의 우스꽝스러운 과학을 의미하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와 ‘메타포(metaphor)’의 합성어입니다. 과거의 상상력이 가상물을 창조함에 있어 관념의 은유적 복제(=메타포)라는 방식을 택했다면, 이제는 관념과 실재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파타피지컬한 상상력(=파타포)으로 진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소위 ‘콘셉트’로 대변되는 매스 미디어의 평면적 공간에 한정된 광고적 상상력을 뛰어넘어 이제는 가상을 현실로 현실을 가상으로 만드는 기술과 아이디어의 융합으로 대전환을 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인권단체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는 가상의 캐릭터를 이용, 인터폴과 협력해 전세계에서 성매수 범죄자를 추적하고 실제 법적 처벌까지 이끌어냈다. 가상과 현실 사이의 중첩 지대를 자유롭게 오간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이루어낸 성과다.

지난 2014년 칸 라이온즈 그랑프리를 수상한 ‘스위티(Sweetie) 프로젝트’는 이러한 상상력이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필리핀 출신의 10세 소녀로 설정한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가상의 3D 캐릭터를 이용해 온라인 아동 성매수 함정 수사를 벌였던 이 프로젝트는 이후 몇몇 국가에서 법률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검거된 피의자들이 ‘상대가 실제 인간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일 뿐’이라며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난 2018년, 스위티 프로젝트가 시작된 네덜란드에서 ‘가상의 캐릭터이라 할지라도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매수 제안을 하는 것을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법률안이 통과되었거나 심의 중에 있습니다. 현실의 부조리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가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정의를 구현했던 이 프로젝트가 광고인들의 상상력과 기술력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깁니다. 뉴미디어 아티스트 제프리 쇼는 “미래의 인류는 파타피지컬한 종이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통해 급격한 디지털 대전환을 맞이한 우리 시대의 소비 인류에게 더 이상 디지털과 현실, 가상과 실재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가상을 현실로, 현실을 가상으로 만드는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입니다.

 


유안드레아 책임 HS애드 Customer eXperience Planning팀

※ 본 아티클은 한국광고총연합회 발간 <ADZ> 칼럼을 전재했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