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치명적인 아름다움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치명적인 아름다움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5.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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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던컨 ( 출처 Click Aamericana)
이사도라 던컨 ( 출처 Click Aamericana)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박가분(朴家粉)은 한국 광고와 브랜드, 나아가 재계(財界)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상품이다. 방물장수 보부상이었던 박승직이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육의전 상인이 아니어도 포목점을 서울에 열 수 있게 되자, 1896년 배오개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승직상점을 열었다. 옷감 장사도 잘 되었는데, 전국적인 인지도를 획득한 건 1916년 박승직의 부인이 여성용 기초화장품을 전통적 성분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을 결합하여 만들어 일종의 사은품으로 고객들에게 제공한 후였다. 이 화장품이 인기를 끌어 아예 상품화하였는데, 박씨네 상점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박가분’이라고 했다.

하루에 1만 갑 이상이 팔릴 정도였다. 그런 성공의 큰 요소 중의 하나가 “살빛이 고와지고 주근깨 없어지는 박가분을 화장하실 때 잊지 마시옵”이란 우리말 운율과 맛을 살린 광고였다. 1920년에 이미 상표등록을 할 정도로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고, 이는 ‘서가분(徐家粉)’, ‘장가분(張家粉)’이란 유사상표를 물리치는 무기가 되었다. 박가분의 성공시대 마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납(鉛, lead) 성분이었다. 납중독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여성들이 나타나고, 1934년에는 얼굴을 망쳤다며 기생이 고소하는 지경에 이르며, 결국 1937년에 생산을 중단했다.

납은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가 쓴 화장품에도 사용했을 정도로 한때는 필수 성분이라고 인식되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미 1869년에 미국의학협회의 설립자 중의 하나인 루이스 세이어Lewis Sayre는 화장품 속의 납으로 인하여 신경이 마비되어 팔이 뒤틀리고, 손을 들어 올릴 수 없는 등의 심신쇠약 상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피해자들은 레어즈(Laird’s) 사에서 나온 ‘젊음의 꽃(Bloom of Youth)’라는 화장품을 사용했다. 백옥 같은 피부의 여성을 그린 광고를 공격적으로 하는 것으로 레어즈 사는 이름이 높았는데, 그 이면에는 그렇게 납 성분으로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있었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치러야 하는 대가이었을까? 보다 치명적인 경우도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출처 Wikimedia Commons

무용을 자유롭게 해석하면서, 고전적인 발레복과 발레화를 벗어던지고 나풀거리는 그리스 복장에 맨발로 춤을 춰 20세기 초 유럽 무용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킨 이사도라 던컨이라는 미국 출신의 문제적 예술가가 있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련에 갔다가 그와 거의 20년 차이가 나는 천재 시인과 결혼하고, 공산주의자라는 혐의가 따라붙었으나 거침이 없었다. 당시의 패션 트렌드를 선도하는 스타일을 선보인 이사도라 던컨의 트레이드마크 중의 하나가 빨간색의 긴 실크 숄이었다. 한참 연하인 남편 예세닌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프랑스에 정착하여 살던 그녀는 1927년 9월 14일 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해변 도시인 니스(Nice)에서 예의 긴 실크 숄을 목에 두 번 감은 뒤에 부가티 스포츠카의 조수석에 올랐다. 차가 떠나자마자 그녀를 배웅하던 친구들은 처참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던컨의 숄 끝부분이 바람에 날리며 뒷바퀴 스포크 휠에 감겨버리며 숄이 마치 교수대의 밧줄처럼 순식간에 그녀의 목을 조이는 걸 지나 목살을 파헤치며, 목뼈를 부러뜨렸다. 부가티가 출발할 때 그가 손을 흔들며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알려져 있다.

“안녕, 친구들. 난 영광을 향해 간다오. (Adieu, mes amis. Je vais à la gloire.)”

출처 Rose Zolock 트위터
이사도라 던컨 사망 기사(출처 Rose Zolock 트위터)

프랑스어 인사말인 ‘아듀’가 다시 보지 않을 때 쓰는 말이라고 해서, 던컨이 교묘하게 자살한 것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셜록 홈즈가 그런 최후를 당했다면 몰라도 그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에 던컨은 너무나 격정적인 예술가였다.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에 있던 미국 출신 예술가들의 대모(代母) 격으로, 던컨을 사랑했다고 알려졌던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은 던컨이 사망 소식과 그 상황을 듣고는 너무 모질고 단호하게 코멘트를 날려서 구설에 올랐다.

“꾸미는 건 위험할 수 있어요. (Affectation can be dangerous.)”

평소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는 던컨이 못마땅했는지, 던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여서 홧김에 그런 소리를 했을 수 있다. 둘 간의 관계나 스타인의 감정 따위는 모르겠고, ‘affectation’을 좀 더 긍정적으로 아름다움을 만들고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던컨 같은 즉각적인 비극은 아니더라도 성형수술의 후유증은 오랜 시간을 두고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아직도 납 성분이 검출되는 화장품도 많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동 자체가 어떤 때는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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