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원숭이와 함께 동물원에 전시된 사나이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원숭이와 함께 동물원에 전시된 사나이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3.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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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벵가, 1906년 브롱크스 동물원 (출처 Wildlife Conservation Society)
오타 벵가, 1906년 브롱크스 동물원 (출처 Wildlife Conservation Society)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프랑스어로 État indépendant du Congo, 영어로 Free State Congo, 한국어로는 콩고 독립국 혹은 콩고 자유국이라고 부르던 나라가 있었다.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존재했는데, 독립이나 자유는 찾아볼 수 없는 역설의 국가였다. 당시 벨기에 국왕이었던 레오폴드 2세가 자신의 사유지에 그렇게 반전의 이름을 붙였다. 레오폴드 2세는 고무, 상아와 같은 자원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는데, 조금이라도 반항의 기미가 보이면 마을 하나를 사람이건 집이건 문자 그대로 초토로 만드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자신들의 행동을 ‘청소’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 콩고 자유국에 오타 벵가(Ota Benga)라는 사람이 있었다. 레오폴드 2세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벨기에 군인들이 ‘청소’해 잿더미가 된 마을의 피그미족 출신으로, 아내와 아이들은 학살당했고, 겨우 살아남은 그는 노예 상인에게 팔려버렸다.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왔다가 사업가이자 지역학 연구자가 된 새뮤얼 필립스 베르너라는 이가 다수의 콩고 지역 부족 출신들과 함께 그를 구입했다. 1800년대 말 미국에는 기독교 해외 전도 열풍이 일었다. 미국 밖 해외에 선교사로 파송된 이들이 많았다. 그 이전 유럽 국가들에서도 그랬지만, 선교사로 갔다가 불법의 소지는 물론이고 반인륜에 종교 교리에 반하는 활동을 벌인 이들이 꽤 있다. 베르너 역시 오타 벵가를 포함한 이들에게 자유를 주려는 인도 목적으로 노예 상인에게 돈을 건넨 건 아니었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의 ‘인간 동물원(Human Zoo)’에 전시할 목적이었다.

박람회가 끝나고 베르너는 그가 데리고 갔던 인간 동물원에 전시되었던 사람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지역 동물과 지질 연구를 했다. 1년 반 동안의 연구 기간에 오타 벵가는 조수 역할을 하며 베르너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베르너가 1906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 오타 벵가도 동행했다. 오타 벵가가 미국행을 결심한 과정과 동기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그가 원해서 갔다고 한다. 가족도 없고, 고향 마을도 사라져 버렸으니 어쩌면 베르너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미국 땅이나 거기서 해야 할 일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아프리카를 다시 떠나면서 계획이 서 있었는지는 역시 불명확하나, 미국에 다시 오자마자 그는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 잠시 있다가 그때 막 개장한 브롱크스 동물원에 원숭이 무리와 함께 ‘원숭이의 집(Monkey House)’이라고 하는 우리 속에 거처하는 전시물이 되었다.

오타 벵가에 대한 뉴욕 타임스 기사 (1906. 9. 9)
오타 벵가에 대한 뉴욕 타임스 기사 (1906. 9. 9)

같은 아프리카계 인간들과 함께 있었던 박람회에서의 인간 동물원과 다르게, 인간 오타 벵가가 야생의 동물들이라는 원숭이 무리와 함께 전시되었다. 오타 벵가는 매일 오후 원숭이와 함께 노는 모습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야 했고, 동물원은 더욱 아프리카 밀림과 같은 효과를 내고자 앵무새도 원숭이 우리 속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그랬는데도 미국 주류 사회에서는 크게 우려나 개탄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인기를 끈 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커뮤니티에서는 격렬한 반대의 소리가 나왔다. 정곡을 찌르는 소리는 흑인 성직자 대표단이 브롱크스 동물원이 있는 뉴욕시의 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왔다.

“이 전시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프리카인을 비하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비하하고 있다.”

결국 동물원 당국은 오타 벵가를 우리에서 나오게 했다. 동물원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했는데, 오히려 그는 더 괴로운 상황에 부닥쳤다. 관람객들이 하루 종일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갈비뼈를 찌르거나 넘어뜨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비웃고 놀려댔다. 정신에 상처받아 문제가 있었는지, 항의 표시였는지 오타 벵거가 그가 걸치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버렸고, 강제로 옷을 입히려 하자 칼을 들고 저항했다. 뉴욕시에서는 그를 유색인종 고아 보호소로 보냈다. 사실 20세를 넘긴 나이였는데, 키가 작다는 데 더해 다른 인종은 어린이로 취급하는 차별의 일종이었다.

처음 오타 벵가를 미국으로 데리고 왔던 베르너가 아프리카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예상과 달리 오타 벵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겠다고 했다. 이후 뉴욕주를 떠나서 버지니아주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담배 공장에서도 일하며 미국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에 다시 온 지 10년이 지난 1916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으나, 뜻을 이룰 길이 없었다. 일차 세계대전 때문에 배편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낙담한 오타 벵가는 숨겨 두었던 권총을 자신 가슴에 대고 쏘았다. 일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제국주의가 오타 벵가의 목숨까지 거두어 갔다.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보았다’라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말처럼 오타 벵가의 전쟁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았다.

오타 벵가 사망 기사, 뉴욕 타임스 1916. 7. 16
오타 벵가 사망 기사, 뉴욕 타임스 1916. 7. 16

(다음 편에 계속)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이화여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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