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 시대의 “인문학적 소양”

4차산업혁명 시대의 “인문학적 소양”

  • 박경하
  • 승인 2023.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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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riscilla Du Preez / Unsplash
사진 Priscilla Du Preez / Unsplash

인문학을 한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람’에 대한 학문이다.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등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인문학 전공자라고 하고, 그의 반대되는 학문으로 과학을 지명한다. 과학의 ‘과’에 해당하는 한자를 보면 ‘과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뇌피셜이지만 나름의 수준에서 정의하면, ‘어떤 현상이 이뤄지는 과정을 실험하여 밝혀내는 것’이 과학이 아닐까 싶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인문학이 강조되는 것은 산업혁명이라는 것 자체가 기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과학의 진보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몰랐던 사실을) 밝혀내는 과학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능했던 것을) 이뤄내는 과학이다. 밝혀내는 과학은 역사의 근원을 찾아내거나 원자, 분자의 생성 원리를 알아내거나, 자연의 섭리와 규칙을 알아내는 일을 한다. 이뤄내는 과학은 그동안 없었던, 심지어 그게 필요한지도 몰랐던 기술을 만드는 일을 한다. 이전에 없었던 기술을 만들면 세상은 변한다. 그래서 산업혁명은 없었던 기술을 만들어서 무언가를 이뤄내는 쪽에 가깝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난 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졌던 때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적극 활용되었던 시점, 그래서 대중화가 빠르게 일어날 수 있었던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 것 같다. 1차 산업혁명 때만 봐도 그렇다. 증기기관이 만들어진 때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증기기관으로 증기기관차를 만들었던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다.

인문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인간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간과 관련된 특정 학문을 연구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결국 인간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혹은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지 하는 등의 소양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기술의 적용점, 활용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산업혁명 시대에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이 기술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다. 즉, 기술에 치우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소양이라는 것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원래 인문학 소양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요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점을 오해하면 안 된다.

돌아가서, 인문학적 소양이 갖춰져 있다는 건 뭘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을 보고 기술적 전문성 못지않게 인문학적 소양이 갖춰져 있다고 말할까? 공자나 소크라테스 같은, 이름 정도만 겨우 아는 사상가들의 책을 여러 권 탐독했다고 한다면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다고 해줄까? 절대 그럴 리는 없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섣부르게 과시하면 외려 관종이라고 내몰리기 쉽다.

‘소양’은 장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묻어나오거나, 적어도 묻어나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자.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 외에도 다양한 사고를 요구한다. 깊게는 아니어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이 두루두루 있는 사람들을 인문학적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의외로”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술자, 공학자로 연상되는 편견을 적당히 벗어나야 한다. 분야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원활하고 적당한 감수성이 존재하며, 글을 쓰거나 대화하는데 몸서리칠 만큼 부담감을 느끼지도 않아야 한다.

회사를 예로 들면 ‘기획서’라는 종류, 즉 내가 어떤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남들을 설득하기 위해 쓰는 문서로 판가름 날 때가 있다. 길지 않아야 하고 복잡하지 않아야 하고 전문성을 어필하되 전문 용어로만 도배되어서는 안 되며, 결국 쉽게 쓰여야 한다. 그런데 전문적인 지식일수록 당연히 어렵다. 그리고 쉽게 전달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전문가들끼리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려운 걸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알고 있는 걸 쉽게 전달하는 건 쉬운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엄연히 다른 분야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공부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니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데이터 분석도 마찬가지다. 데이터라는 것도 이미 충분히 과학적이고 어려운데, 거기에 과학을 붙여서 데이터 과학, 데이터 사이언스라고 부르면서 이제는 인문학적 소양을 슬며시 끌고 왔다.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분석 결과라는 것이 결국, 청중이 알아듣기 쉬우면 인사이트가 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난해한 허상이 된다. 디자인은 어떤가? 디자인에도 요즘은 ‘공학’이라는 말을 붙인다. 창의성을 과학적으로 풀어보자는 것이다. 거기에 또 인문학을 덧댄다. 기술에만 너무 치우치지 말라면서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의 기반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진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기술 전문가와 이야기할 때는 미리 어느 정도 기술 용어를 배우려던 것에서 기술이야 어떻든 간에 쉽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대우받는 시대로 변화 중이다. 전문가가 뭐 그것까지 해야 하나 싶겠지만,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설명할 때도, 백종원이 집밥을 만들 때도 생각해 보면 쉬운 설명이었다. 우리는 그리고 그것에 열광했다.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이라는 것은 어쩌면, 단순히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가진 기술을 어떻게 사람들이 잘 쓰게 만들지를 여러 사람과 다양한 관점으로 소통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닌가 싶다.

 


박경하 엠포스 빅데이터실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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