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경성(京城. 서울)의 백화점

[신인섭 칼럼] 경성(京城. 서울)의 백화점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4.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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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아직 증축한 미쓰코시 백화점이 들러서기 전 남산 쪽에서 본 조선은행(한국은행) 주변
1920년대 중반, 아직 증축한 미츠코시 백화점이 들러서기 전 남산 쪽에서 본 조선은행(한국은행) 주변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00이라 숫자는 전부, 전체 혹은 모든 것을 말하는 낱말이다.

따라서 백화점(百貨店)은 없는 것 없이 모든 물건이 전시, 판매되는 곳이다. 경제적으로는 시장 진출의 소식이며 물질문화의 전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 백화점이다. 물론 경제 침략의 첨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백화점은 갖가지 옥외광고의 전시장이요 집대성이다.

차경환의 <경성의 백화점과 주변>이라는 좋은 글 가운데는 서울의 상가 중심이 된 남대문로 주변 및 유일한 조선인 경영 백화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화신(和信. Whashin)을 포함한 5개 백화점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들이 나와 있다. 지금은 충무로이지만 일제 강점기만 해도 혼마치(본정. 本町)이라 해서 경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지고 유행의 선단이던 거리의 컬러 사진들이 그의 글 가운데 나와 있다.

4개 일본인의 백화점(붉은 글자)이 표시된 서울 중심가 그림
4개 일본인의 백화점(붉은 글자)이 표시된 서울 중심가 그림

우선 5개 백화점 중 4개의 포장 스티커(Seal)가 있다. 지금은 신세계 백화점이 된 미츠코시(三越. Mitsukoshi), 퇴계로 입구에 있다가 사라진 히라타(平田. Hirata)와 미나카이(三中井. Minakai) 그리고 롯데 영플라자가 된 쵸우지야(丁子屋. Chojiya)이다. 쵸우지야는 슬로건 두 개와 깃발이 있다.

4개 백화점의 포장 스티커
4개 백화점의 포장 스티커

경성 진출의 연도가 경성 5대 백화점의 개요표에 나와 있는데 쵸우지야(1904), 미츠코시(1906), 히라타(1908), 미나카이(1911)의 순이다. 미츠코시는 1906년에 백화점을 시작했고 미나카이, 쵸우지야, 히라타는 1920년대 중반, 그리고 화신은 1932년에 백화점 사업을 시작했다. 점포 증,개축(增,改築)이 있는 것은 1920-30년대 후반이었다. 달리 보면 일본과 그 식민지이던 조선의 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하던 1930년대가 전성기였다.

전체면적은 쵸우지야(3,793평), 미나까이(2,363평), 미츠코시(2,255평), 화신(2,031평), 히라타(799평)의 순이었다. 종업원의 수는 가장 적은 히라타가 200명이고 가장 많은 곳이 화신의 623명이었다. 화신은 홀(Hall)이 500석에 이르러 가장 많았다. (동아일보가 2938년에 시작한 전국 상업학교 생도 대상 광고상 수상작 전시와 설명회 장소는 화신 백화점 갤러리였다.)

경성 5대 백회점 개요 (출처 : 《일본백화점총람》(1939판) 일본백화점신문사, 1939년)
경성 5대 백회점 개요 (출처 : 《일본백화점총람》(1939판) 일본백화점신문사, 1939년)

1935년에서 1939년, 5년 동안에 이 5개 백화점이 납부한 영업세는 15,849엔에서 약 70%가 성장해 26,637엔으로 증가했으니 연평균 성장률은 14%로 대단한 성장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화신의 경우였다. 백화점이 된 1937~1939년 기간, 3개년의 자료인데 영업세 액이 2,701엔에서 5,850엔으로 112% 성장해 연평균으로는 37.3%라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

유일한 한국인 경영 백화점이며 그 당시 조선은행(한국은행) 주변 흔히 남촌이라 부르던 지역에 모여 있는 일본인 경영인 4개 백화점과 북촌이라 부르던 전통적인 시장 종로에서 경쟁한 화신이었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인 창립자 박흥식은 대단한 사업가였다. 해방 이후 그의 친일 행각과 경영 부진으로 화신은 이름만 남아 있다. 종로 네거리에 있던 웅장한 건물도 사라졌다. 화신은 현관과 옥상 그리고 내부 장식들이 모두 현대적 옥외광고물의 집대성이었다.

일제시대 시골 6학년 수학여행 필수 방문 코스였다. 아울러 ‘공짜’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처음 타보는 곳이 화신이었다. 일본인 경영 미츠코시(三越)는 신세계가 되었고 그 건물은 서울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화신 백화점
화신 백화점
1940년경 촬영된 르네상스 양식의 곡면 구조를 한 미쓰코시 경성지점은 일본 미쓰코시 니혼바시 본점의 60% 수준의 규모로 지어졌다고 한다(왼쪽) 신관 낙성을 알리는 경성일보 1930년 10월 24일자 신문광고(오른쪽)
1940년경 촬영된 르네상스 양식의 곡면 구조를 한 미츠코시 경성지점은 일본 미츠코시 니혼바시 본점의 60% 수준의 규모로 지어졌다고 한다(왼쪽) 신관 낙성을 알리는 경성일보 1930년 10월 24일자 신문광고(오른쪽)
쵸우지야 백화점
쵸우지야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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