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100년 전 조선 8개 부(府. 시) 협의원 선거

[신인섭 칼럼] 100년 전 조선 8개 부(府. 시) 협의원 선거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4.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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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919년 3•1 독립운동에서 흘린 피의 대가로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한 “무단정치/헌병정치” 10년은 끝나고 “문화정치”로 바뀌었다.

이해 8월 12일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람은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 Saito Makoto. 1858-1936)이다. 61세의 해군 대장 출신이다. 주미 일본대사관 무관, 그리고 여러 국제회의에 참여한 경력을 가진 군인/외교관이었다. 조선 총독 8명 가운데 환갑을 갓 넘은 나이에 총독이 된 유일한 해군 출신이다. 고작해야 일본, 한국, 중국 그리고 제정 러시아밖에 모르는 육군 출신에 비하면,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체험한 해군 제독 사이토는 달랐다.

그는 우선 무단정치를 종식하고 문화정치로 바꿨다. 취임 이듬해 1920년 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을 허락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자치를 시작했다. 그것이 1920년에 시작한 시(부), 읍, 면회원 선거였다. 부(府)는 지금의 시(市)이다. 1920년에 시작한 선거는 그 뒤 3년마다 실시했고, 의원(회원)의 권한에도 초기의 자문 역할에서 차차 확대되었다.

올해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 행태들이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듯, 100년 전에도 비슷했다. 다만 라디오, TV, 스마트폰, 인터넷이 없었고 자동차가 없는 것이 달랐다고나 할까. 그리고 하나 더 하면 Fake 가짜가 지금 같지 않았다.

1926년 11월 20일 부(시) 협의회원 선거가 끝난 이틀 뒤 조선일보는 22일 4면 크기 석간 1면에 “부 협의원 선거의 결과(府協議員選擧의結果)”라는 사설을 실었다. 경성(서울), 인천, 군산, 부산, 목포, 평양, 신의주, 청진 8개 도시의 선거 결과를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구분해 설명하면서 조선인의 참패를 언급하고 조산 사람의 각성을 제창했다. 이 사설에서 언급한 8개 도시의 투표 결과를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협의회원 일본인 조선인
경성(서울) 30 18 12
인천 20 12 8
군산 14 10 4
부산 30 28 2
목포 14 8 6
평양 30 11 19
신의주 14 9 5
청진 14 10 4
합계 166 106 60
비율(%) 100 63.9 36.1

총 166명의 협의회 회원 가운데 일본인은 106명이 당선되었고, 조선인은 겨우 60명이 당선되었다. 비율로는 일본인 64%, 조선인 36%였다. 가장 심한 곳은 부산으로 30석 가운데 93%인 28석이 일본인이었다. 반짝한 곳은 오직 평양 뿐으로 30명 자리에 19명, 즉 63.3%가 조선인이었다.

100년 전 선거의 낙수 1926년이나 2024년이나 선거에 여담은 있게 마련이다. 100년 전 1926년 11월 20일 투표가 있기 9일 전인 11월 11일 자 조선일보(석간)에는 시의회원 선거 간판이 남대문을 가릴 만큼 난립하는 광경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물론 당시 남대문은 국보 1호는 아니었으나 조선의 수도 남문이었음은 사실이었다. 가장 큰 간판 두 개는 일본인 이름이고 중간 크기 두 개의 한국인 이름과 작은 글씨의 1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마도 당시 선거 홍보 매체 가운데 가장 중요했을 간판 선전전에서 한국은 뚝 뒤지고 있다. 이 추해진 남대문 사진 캡션은 “부 협의 간판에 얼굴 더럽힌 남대문”이라 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낙수 하나 더. 일생일대의 행사가 끝났으니 잔칫상을 차려야 할 것이고 선거 기간 많은 보도를 해 준 신문에 신세 갚음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그 표현 방식이 그야말로 천편일률이었다.

경성과 인천은 조금 달랐으나, 도시 단위로는 꼭 같은 내용이었다. 다른 것은 크기인데 돈 많은 사람일수록 광고가 크다고 할까. 경성의 예를 들어 본다. (한문을 한글로 띄어 써서 옮겼다.) 넉줄과 일자 그리고 이름의 순이며 처음 석 줄은 15자이고 넷째가 14자로 모두 59자이다. 신문사 광고부는 일하기 편했을 것이다. 물론 한 번이지만 단가가 비싼 정치광고라 광고 수입은 짭짤했을 것이다.  

당선 사례(當選謝禮)

금반 경성부 협의회원 선거에 제하여 (15자)

유권자 제씨의 심후하신 동정으로 행 (15자)

히 당선의 광영을 몽하얏삽기 자에 지 (15자)

상으로써 근히 사의를 표하나이다 (14자)

조선일보 11월 22일 신문
조선일보 11월 22일 신문

제3대 8년, 1920년~1927년, 그리고 6대 2년, 1929년~1931년 합쳐서 10년을 조선 총독으로 있은 사이토의 문화정책이 한국을 사랑하고 그 문화를 존경해서 한 일은 아니었고 순종하는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즐비하게 서있는 선거 간판 보도가 있는 조선일보 1926년 11월 11일 지면에 깎여 나간 곳이 두 군데나 있는 데에서 나타난다. 총독부 정책에 어긋나는 부분은 가차 없이 삭제한 것이다. 사이토는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 급진파가 일으킨 실패한 쿠데타 때 살해당했다.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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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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