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부산: 한국 최초의 박람회장과 한국 최초의 신문, 일본어 순보(旬報)

[신인섭 칼럼] 부산: 한국 최초의 박람회장과 한국 최초의 신문, 일본어 순보(旬報)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4.02.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부산에 관해 덜 알려진 일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국 최초의 박람회가 열린 곳이 부산이라는 사실. 두 번째는 한국 최초로 신문이 발행된 곳이 부산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어 순간이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이 두 가지가 모두 부산에 창설된 일본 상업회의소가 주최였다는 사실이다. (상공회의소라는 이름은 뒤에 생겼다.)

일한 상품 박람회. 1906년

1906년 4월 25일에서 6월 25일까지 92일 동안 사진에 나오는 건물에서 한국 최초의 “일한 상품 박람회”가 열렸다. 사진 아래 캡션에는 ‘일한 상품 박람회 회장(日韓商品博覽會會場)’이라는 한문과 The Exhibition of Merchandise of Japan-Corea라는 영문이 있다. 서양식 건물이며 3층, 건평 63평. 외형은 원뿔 모양. 그런데 당시 부산 최대의 건물이라 불렀다. 개관은 1905년 4월 16일이었다.

일한 상품박람회장
일한 상품박람회장
1908년 부산 일본인 거류지와 현재 위치 지도 (자료 송혜영. 부산 일본 전관 거류지의 형성과 변화에서 나타난 건축적 특성애 과한 연구.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1908년 부산 일본인 거류지와 현재 위치 지도 (자료 송혜영. 부산 일본 전관 거류지의 형성과 변화에서 나타난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한국 최초의 박람회에 관해 자세한 내용은 차철욱 교수의 논문 『1906년 일한 상품 박람회의 수입 무역의 동향』에 나와 있다. 이 논문에 의하면 박람회를 위해 한국 정부는 5,000원이라는 거금을 찬조했다. 한국 최초의 박람회에 한국이 참가하며 지원한다는 증거였다. 초대 통감인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300원을 기부했다. 개회식에는 한국 정부를 대표한 이완용 학부대신과 고위 관리들이 참석했다. 통감부에서는 농상공부 총장이 명예회장으로 참석했다. 따라서 비록 부산의 일본 상업회의소가 주최한 행사이지만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정부가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행사가 열리게 된 시대적 배경을 간단히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1876년의 강화조약으로 한국은 쇄국에서 개방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1894~5년 청일전쟁은 일본이 승전했다. 10년 후 1904~5년 러일전쟁에서는 다시 일본이 이겨서 일본이 세계 무대에 올라서게 되었다. 한편 1905년에는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1905년에는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또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이 개통되었다 (“관부”란 일본 항구인 하관, 下關. 시모노세끼, 둘째 글자 “관(關)”과 부산의 “부(釜)”를 딴 이름이다.) 그 결과 일본-한국-중국(만주)을 잇는 수송망이 개통되었다. 부산은 이제 일본의 대륙 진출의 중요한 연결 첫 고리로 등장했다. 이 기회에 착안한 것이 “일한 상품 박람회”였다. 박람회를 주최한 부산 일본 상업회의소는 1879년에 창설되었는데, 창립 때 이름은 “상법회의소(商法會議所)”였다. 그리고 창설의 주동 인물은 모두 부산에 진출한 무역상이었다. 즉 일본 상품을 가져다 파는 상인이었다.

송혜영. 부산 일본 전관 거류지의 형성과 변화에서 나타난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해양대학교
출처 송혜영. 부산 일본 전관 거류지의 형성과 변화에서 나타난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차 교수의 책에 의하면 박람회 출품자는 580명인데, 일본인은 93%인 542명이고 조선인은 겨우 38명, 7%였다. 일본인 가운데 122명은 부산에 진출해 있었다. 출품의 수는 1,741종, 개수로는 31만 9천 172점이었다. 관람객의 수는 총 7만 7천 9명인데, 일본인이 4만 8천 996명, 조선인이 2만 6천 130명이었다. 1906년 부산 거주 일본인의 수는 16,000명이었으므로 일본인 관객의 수가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부산 거주 조선인의 수는 3만 8천 명이었다.

부산 외의 지방 관람객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1905년에 개통된 경부철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개항 이후 1910년 무렵 부산 거주 일본인 인구 추세의 그림과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부산 거주 일본인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1903년 1만 명을 넘어 11,711명이던 인구가 1905년에는 13,364명, 1910년에는 21,928명으로 폭증했다.  

여론 조사가 있던 때도 아니었는데, 일본인 발행 “조선시보” 경주 통신(1906.7.5.)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다.

앞서 계림학교 학생이 부산에서 개회 중인 박람회를 관람한 이래 평판이 아주 높다. 학생 부형들은 물론 기타 관광 겸 부산으로 가는 것이 많다. 특히 부녀자 사이의 평을 들으면 용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다. 나도 선인(仙人)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주위 사람에게 자랑한다. 모두 일본의 문명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차 교수의 책)

박람회를 주최한 일본 측의 목적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폐회식에서 부산 통상 감리 총책임자이던 동래 감리 이무일의 말 가운데 조선이 박람회에 참가한 이유의 일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계속 박람회를 열어) 서로 무역의 진보 발달을 기도하고, 마침내 우리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우리 병사를 강하게 해서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 한국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일한(日韓) 양국의 대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행사에는 시상이 따르기 마련이다. 한국 최초의 박람회에서도 여려 가지 상패, 메달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협찬 회원에게 준 메달인데 앞면에는 태극기와 일본기가 있고 뒷면에는 박람회 연도 일본 명치 39년 (1906) 4월이란 일자가 나와 있다.  

협찬 회원 기념 메달
협찬 회원 기념 메달

조선신보(朝鮮新報). 부산에서 창간된 최초의 일본어 신문, 순보

1879년 부산에 창설한 일본 “상법회의소”가 한 일 가운데 두 번째는 신문 발행이었다. 1881년 12월에 창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어 신문(순간)은 한국 고서 동우회(古書同友會)가 1984년 많은 고생 결과 일본에서 얻어 온 신문(복사판)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82년(明治 15년) 3월 5일 제5호에서 5월 15일 제12호까지 8개호가 남아 있다. 1883년 10월 31일 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가 발행되기 2년 전으로 그 무렵 일본의 신문 발행 및 신문광고 제도의 일단을 한국 부산에서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8개호 가운데 광고가 게재된 것은 제9호, 10호, 11호, 12호이다.

명치 15년(1882) 4월 15일 조선신보 제9호 표지. 대마도에 있는 회생당 삼산(回生堂 三山)의 양광고가 처음으로 게재된 신문(좌), 회생당 삼산 약방의 천금단발매병제국 묘약 대취차 판매 광고(千金丹發賣並諸國 妙藥 大取次販賣廣告). 두 페이지에 걸쳐 있다.(우)
명치 15년(1882) 4월 15일 조선신보 제9호 표지. 대마도에 있는 회생당 삼산(回生堂 三山)의 양광고가 처음으로 게재된 신문(좌), 회생당 삼산 약방의 천금단발매병제국 묘약 대취차 판매 광고(千金丹發賣並諸國 妙藥 大取次販賣廣告). 두 페이지에 걸쳐 있다.(우)
일본 나가사키 하물 취급소의 광고 및 조선신보 복제판을 한국에서 출판한 한국 고서동우회(古書同友會) 조서신보(朝鮮新報) 표지(좌) 조선신보 광고와 구독료 발표(우)
일본 나가사키 하물 취급소의 광고 및 조선신보 복제판을 한국에서 출판한 한국 고서동우회(古書同友會) 조서신보(朝鮮新報) 표지(좌) 조선신보 광고와 구독료 발표(우)
페이지: 한국고서동우회가 발행한 조선신보 복사판의 페이지이다.
페이지: 한국고서동우회가 발행한 조선신보 복사판의 페이지이다.

신문 편집의 순서는 부산의 일본 영사관 뉴스를 전하는 영사관 녹사(錄事), 조선신보 (기사), 잡보 (사회), 부산 상황(商況), 개항한 항구 원산 통신, 기서(투고), 물가표였다. 평균 18페이지이었다. 광고는 기사가 끝난 다음에 게재되었다. 9호~12호에 게재된 광고는 두 가지였는데 2페이지에 걸친 약 광고와 “보고“라고 한 대리점 안내 광고였다. 따라서 “광고”라는 말과 “보고”라는 말이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국 광고(本局廣告)는 광고와 구독료에 관련된 내용인데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광고: 본지 광고료 4호 활자 1행 25자 한 줄: 1회 게재에 3전; 2회 게재에 4전; 3회 이상 5회까지 5전. 단 한 줄당 25자 이하라도 광고료는 같으며 모두 사전 지급. 따라서 게재 횟수 증가에 따라 상당한 할인을 제공하고 있다.

구독료: 정가는 1부당 4전이나 10부 헌금이면 모두 10% 할인해서 부당 3.6전. 다만 부산 이외 지역인 경우는 우편료를 따로 받는다. 선금 지급 기한이 경과하더라도 구독 중단 통보가 올 때가지는 계속 발송한다.

신문사 주소와 신문 구독/광고 판매 대리점이 따로 있었는데 주소에서 나타난다.

이른바 Frequency & Volume Discount 제도 즉 광고량과 게재 빈도에 따르는 광고 요금 할인 그리고 구독 신청이 많을 경우의 할인제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제도는 그 뒤 일본에서 일단 사라졌다가 다시 60년대 이후에 제도화되었다. 부산에서 시작된 박람회는 1907년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국권피탈 5년이 되는 1915년에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대대적인 박람회 행사로 이어졌고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한국은 국제 박람회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06년의 일한 상품 박람회는 비록 일제시대의 하찮아 보이는 행사이기는 해도 그 싹이 튼 행사였고 부산에서 시작된 행사였다. 신문 역시 1883년의 한성순보 그리고 1886년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고백(告白)” 광고가 게재된 한성주보 및 최초의 한글 신문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로 이어지는 우리 신문의 역사가 항구 도시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