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죽더라도 위스키는 마시고 싶어

[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죽더라도 위스키는 마시고 싶어

  • 김시래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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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공녀' 중에서
영화 '소공녀' 중에서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은 가사도우미다. 그녀는 일당 사만오천원의 생활비로 살아간다. 방값이 오르자 악단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집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녀에게 방은 다음 날을 위해 그저 하룻밤을 들러가는 곳이지만 담배와 위스키는 포기 못할 위안이고 휴식이다. 궁핍하지만 그녀는 위선이나 위악을 드러내지 않는다. 담배 한모금과 위스키 한잔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병상련의 남자친구가 현실과 타협해서 이별을 선언하는데도 무겁지 않게 털어낸다. 그러나 약을 먹지못해 하얗게 시어버린 머리로 한강변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은 서늘했다. 한때 그녀의 도움으로 살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룻밤을 거절하는 악단동료들의 모습이 벌레가 되버렸다고 자신들을 먹여살린 아들을 떠나버리는 '변신(프란츠 카프카)'속 그레고리 잠자의 매정한 가족과 오버랩되며 떠올랐다. 집은, 가족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녀가 보여준 삶의 태도는 어떤 의미일까. 

심리적 만족으로 물건을 소비하는 ‘플라시보 소비’는 젊은이의 최신, 최애 트렌드다. 그들의 할부카드는 스마트폰 속 친구들에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 줄 물건값으로 채워진다. 애인끼리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서로 명품을 교환하는 풍속도 그렇게 생겨났다. 영화 속의 소공녀도 비슷한 곳에서 살고있다. 쌀도 없고 돈도 떨어지고 몸 하나 누일 곳 없지만 담배와 위스키는 지출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행복감을 지켜줄 그들을 고집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늘 당신이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의 유전자 그대로다. 그래도 그걸 아껴 방을 얻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게 상식이 아니겠냐고? 그래야 미래가 있지 않겠냐고? 곧 세상으로 발을 내딛을 딸 둘을 둔 나는 물론 동의한다. 하지만 내일 죽더라도 떡뽁이는 먹어야겠고 하마트면 열심히 일할 뻔 했다는 그들은 좀 다른 생리를 지니고 있다.

대학에서 한 과목을 맡아 광고를 가르친 것이 6년째다. 지난 가을학기의 내 수업, "광고 아이디어 발상법"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비정하리만큼 인색했다. 비대면수업의 피로도를 고려해서 쉬는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강의계획서와 달리 과제가 늘어나 할애된 시간이 너무 많아서라고 했다. 어떤 학생은 과제가 추상적이여서 실질적인 도움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내준 과제는 "자신의 생활 속 인문적 경험으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고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아이디어를 동영상으로 만들어 발표할 것"이라는 것이였다. 평소 광고 이론이나 사례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인사이트를 발견하고 상징화하는 관찰력과 해석력이 발상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러나 교재에 의존해서 읽고 줄치고 요약하고 정리해서 리포트를 쓰거나 아예 섣부른 제작물을 만들어 공모전에 출품해서 취업 포트폴리오의 근거자료로 활용했던 그들에겐 당황스런 요구였을 것이다. 학생들의 반응과 태도에 실망했다는 내 말에 선배교수는 그들과의 눈높이를 생각해야 할 듯하다고 조언해 주었다. 대학생을 광고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였는지 자문해보고 비대면 수업에 맞는 수업방식도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 분의 지적에 일리가 있었다. 실망에서 벗어나 역지사지의 성찰이 필요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다시 들여다보고 수업에 적용할 개선책을 찾아야했다.

이제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 아니다. 시대흐름에 따라 유용성과 효율성을 쫓아 실용 지식으로 기업과 스타트엎 시장에 인력을 송출하는 양성소로 탈바꿈했다. 그러니 학점은 최소한 인턴쉽을 거머쥘 자격증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대학생활은 스마트폰 안의 액정 속에 갇혀버렸다. 한 점 남은 낭만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들의 상실감과 박탈감은 생각보다 깊고 큰 듯하다. 그러니 이유가 불분명한 어떤 침해나 특혜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원칙과 규범을 중시하고 공정에 민감한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맞다. 강의는 강의계획서대로 진행되야 한다. 휴식시간은 정확하게 지켜야하고 과제와 평가도 쉽게 설명되고 수긍되도록 재구성되야 한다. 사지선다형이나 괄호안에 답을 채우는 방식도 터무니없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였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내 자발적 헌신도 다른 과목에 안배해야 할 그들의 시간을 빼앗았다면 무분별한 독점욕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소공녀가 고집했던 담배와 위스키 또한 안주와 나태를 몰고 온 그녀만의 틀이였다면 어쩔것인가. 살다보면 언제 어디서든 마주치는 막힌 길을 돌아나가려면 거침없이 피버팅을 해야하는데 자기 색깔만을 고집하다 어딘가에 펼쳐진 무한대의 가능성을 놓친다면 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길다. 지금 그녀는 어디에 살고있을까?
 


김시래 동국대 겸임교수, 한국광고총연합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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