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포드와 GM, 드디어 한국에 진출

[신인섭 칼럼] 포드와 GM, 드디어 한국에 진출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3.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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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자동차의 1928년 2월 23일자 광고
포드 자동차의 1928년 2월 23일자 광고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928년 2월 23일 목요일, 동아일보에는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2단으로 짠 전면 광고의 윗단 중앙에는 Henry Ford 라는 서양인의 서명과 사진이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광고는 본 적이 없었다. 헤드라인은 “신포드 자동차의 피로” 그리고 작은 글자로 “헨리-포-드 술(述)”이라 했다. 신포드 자동차란  A-모델로 T-모델을 대치했다. (모델명은 개발 순에 따라 알파벳 순으로 지었다.) 광고의 첫머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회고컨대 19유여년전(有餘年前) 최초의 T-형 포드 자동차를 제조 발매할 때에 나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은 말은 하였습니다. 포드 회사는 일반 민중적 자동차를 이에 제공합니다. 그것은 가족용으로나 또는 개인용으로 가장 적당하고, 운전과 수선이 매우 간단합니다. 기계공학상(機械工學上) 가장 간단한 고안에 의하여 최상급의 재료를 가지고 가장 우수한 기사가 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격이 저렴하여 상당한 수입이 있는 분이면, 누구나 사실 수가 있습니다.”

물론 상당한 수입이란 말은 미국 시장을 두고 한 말이다. 이어서 포드는 19년 전인 1909년 발매한 T-형에 대해 19년 사이에 무려 1,500만대를 팔았다는 것을 말했다. 광고 아랫단에서는 신차의 좋은 점을 기술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뒤이어 24일에는 “신포드차의 가격은 매우 저렴”이러는 헤드라인과 함께 오는 25일부터 27일 기간에 남대문로에 있는 “쎄일 상회” 판매소에서 진열 공개를 한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일반인들도 환영하며 오전 9시에 개장한다고 발표했다. 둘째 날 24일 광고에서는 진열 공개와 함께 포드 자동차가 가지고 있는 특징 20가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3일째에는 신형 포드의 사진 7개와 그 특징과 가격을 제시했다. 승용차가 6개이 트럭이 한 개였다.

포드 자동차의 1928년 2월 24일자 광고
포드 자동차의 1928년 2월 24일자 광고
포드 자동차의 1928년 2월 25일자 광고
포드 자동차의 1928년 2월 25일자 광고

놀라운 일이었다. 3만 8천 부가 발행되던 동아일보에 3일 연속 전면 광고가 나온 것은 당시로는 처음이었다. 천지개벽이라고 말해도 무관할 만한 일이었다. 아마도 1920년 동아일보 창간 이후 초유의 일이었으며, 독자들도 이런 3일 연속 전면 광고란 처음 보았을 것이다. 포드 자동차의 광고는 뉴스거리였을 것이다.

한 달 뒤 3월 31일에는 다시  GM의 시보레(일본식 발음이며 쉐보레)의 전면 광고가 게재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야흐로 포드와 시보레의 각축전이 한국에서 전개되었다.

1928년 3월 31일자 시보레 광고
1928년 3월 31일자 시보레 광고

두 자동차 광고의 한국 시장 진출은 한국 광고에 몇 가지 새로운 것을 제시했다. 첫째는 자동차 광고는 놀라운 규모임을 제시했는데, 후속 광고의 크기와 빈도에서 나타났다. 크기는 대개 신문의 3분의 1였는데, 당시로써는 큰 광고였다. 다음으로 광고의 형태가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영어 신문의 형태였다. 광고 내용이 사실 설명으로 과대 과장이 없는 직설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광고회사가 광고를 집행하고 있었다. 포드 자동차 광고는 당시 일본에서 발행하던 영자지의 계열회사가 대행했고, GM 광고는 오사카의 손꼽는 광고회사인 만년사(萬年社)가 대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광고주의 이름은 요코하마시의 “일본 포드”와 “일본 제네랠•모-터-스 주식회사”였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미국과 일본의 합작 자동차 회사의 광고가 두 광고회사를 통해 그 방대하고 장기적인 광고를 했다는 것 이외의 자료는 없다. 누가 어떻게 신문사와 거래를 했으며  광고료는 얼마이고 광고 내용의 번역은 누가 어떻게 했는가 따위는 전혀 기록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선 미국의 광고제도를 배울 좋은 기회를 놓쳤다.

포드와 GM의 이 광고는 또 다른 영향을 남겼을 것이다.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되는 미국의 방대한 힘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3만 8천 명이라는 유식층에게 남겼을 미국이라는 나라의 홍보 효과는 측정하기 힘들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란 이런 것이랄까.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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