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로 주최한 국제 광고회의 - 낙수(落穗), 이삭 줍기.

[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로 주최한 국제 광고회의 - 낙수(落穗), 이삭 줍기.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3.07.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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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1984년 2월 3일 파키스탄 광고 행사 보도 기사
DAWN 1984년 2월 3일 파키스탄 광고 행사 보도 기사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984년 6월 18일~21일 나흘 동안 서울역을 내려다보는 힐튼 호텔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주최하는 제14차 아시아 광고회의가 열렸다.

국제회의는커녕 국내 광고회의도 제대로 주최한 일이 없는 터였다. 어떤 국제회의도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이다. 세 사람이 프로그램 위원의 핵심이 되었다. 광고회의 회장인 오리콤 사장 김석년, 한국방송광고공사 전무이사 이기흥, 그리고 신인섭이었다. 말은 쉽지만, 국제 광고회의 프로그램 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회의 주제 설정과 주제에 알맞은 연사를 세계 광고계에서 찾아 초청한다는 일은 무척 까다로운 외교 행사이기도 하다. 왜? 자국의 대표가 연사로 나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세계 광고계를 알고 섭외할 줄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영어가 필수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국제회의가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는 좋은 프로그램이고 훌륭한 연사를 초청해야 한다. 둘째는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 해도 알리는 문제가 있다. 즉 행사 홍보이다. 이 일 역시 간단하지 않다. 아시아 광고회의이므로 아시아 국가가 중심인데 UN 통계에는 아시아에 48개 국가가 있다. 그러니 선별적일 수밖에 없다. 아시아광고회의 관례는 대개 3인이 한팀이 되어 순방하는데, 로드쇼라 한다. 셋째가 종잣돈이 있어야 한다. 정부 지원이나 별도 스폰서가 없는 민간 국제회의 재원은 회의 참가자의 등록금이 주된 수입원이다. 물론 찬조금도 중요하다. 그런데 등록금은 대개 회의 시작 3~4개월 전에야 생긴다. 그러니 수입이 생길 때까지 일할 돈이 있어야 한다.

사무총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받은 내가 맡은 일은 프로그램 작성 외에 홍보, 판촉이었다. 한국과 국제 광고계를 알고 프레젠테이션할 영어 능력은 필수이다. 돈도 부족하고 판촉에 나설 사람도 없어 나 혼자 6개 나라를 강행군했다.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인도, 파키스탄이었다. 가는 곳마다 매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제일 걱정했던 파키스탄의 환영은 의외였다. 이번 회의 기간 중 4년 후 제16차 아시아광고회의 개최지를 결정하게 되므로 후보로 나선 오스트레일리아와 파키스탄이 경합하는 상황이었으므로 회의 주최국인 한국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이 이겼다.)

아시아 광고대회와 신인섭 사무총장의 방문을 설명한 간행물
아시아 광고대회와 신인섭 사무총장의 방문을 설명한 간행물

나는 나 나름대로 로드쇼 계획을 짰는데 첫 방문국을 파키스탄으로 잡았다. 10여 회의 아시아 광고회의가 있었으나 단 한 번도 파키스탄에 판촉 방문조차 없었다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광고회의 프레젠테이션은 파키스탄 전국 광고대회와 같은 날이었다. 군의 영향이 큰 나라이라 공보부 장관은 육군 중장이었다. 파키스탄 최대의 도시인 카라치에서 회의가 있었다. 카라치에서는 한국 총영사관도 예방했고 참석을 권했다. 4~5명의 외교관이 있었는데 총영사는 옛날 내가 논산 훈련소에서 소장과 수석고문 통역장교로 있을 때 중대장을 지난 분이라 더욱 반가웠다. 그는 기꺼이 회의에 참석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파키스탄 광고협회가 보내온 서신
파키스탄 광고협회가 보내온 서신

더운 나라라 회의는 2월 2일 저녁 7시에 시작했다. 공보부 장관인 현역 중장이 회의장에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소개를 받은 뒤 군대 경례를 하고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 소령 신고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는 곧 의미를 알아차리고 악수하며 환히 웃자, 긴장되어 있던 장내 분위기는 대번에 화기애애해졌다. 그날은 밤늦게까지 회의에 참석한 대학생들 사인 공세와 신문, 잡지 기자회견을 하느라고 새벽 2시까지 잠자지 못했다. 공보부 장관이 참석한 행사라 파키스탄 내의 모든 언론이 이 행사를 크게 다루었다.

뒤에 들은 일이지만, 당시 파키스탄은 북한과 가까워서 북한 카라치 총영사관에는 40여 명의 외교관이 나와 있었다. 이들은 매일 아침 10시 조금 지나면 우리 공사관에 전화를 하고 동정을 살피는 것이 관례였다 한다. 그런데 2월 2일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파키스탄의 모든 언론이 광고대회와 공보부가 제공한 아름다운 한국 영상이 들어간 내 프레젠테이션 방송을 보고 카라치의 북한 공사관에 난리가 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파키스탄의 유력 영문 일간지 “DAWN (여명)”은 이튿날 행사 보도와 아울러 내 인터뷰 기사를 사진과 함께 꽤  크게 다루었다. 파키스탄 국어 신문과 방송은 말할 것도 없다. 카라치 한국 총영사관의 “특종  보고”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DAWN지의 신인섭 인터뷰 보도
DAWN지의 신인섭 인터뷰 보도

자유 민주주의 상징의 하나인 광고가 국가 홍보에 일익을 다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조금 보태자면 파키스탄에서 이런 대한민국 홍보 행사는 전무후무였을는지 모른다.) 

영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 공통되는 현상이지만 광고에 대한 의식 자체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다른 사회 그리고 매스 미디어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DAWN의 기사를 보면 “사농공상”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 언론의 광고관을 알 수 있다.

저녁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밤잠도 설친 1984년 2월 21일 카라치의 한국 주최  제14차  아시아 광고대회 첫 프레젠테이션은 이렇게 끝났다. (파키스탄은 40여 명의 대표단을 보냈다.)

금년 10월 24일에서 27일 기간 한국이 주최하는 세 번째 아시아광고대회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관 단체의 김낙회 회장을 위시한 조직위원회의 수고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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