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우지 않는 제안서 쓰는 법 1편

밤새우지 않는 제안서 쓰는 법 1편

  • 박경하
  • 승인 2023.1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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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서 잘 쓰는 방법이 아닌, 밤새우지 않는 방법
구조화가 어렵고 도식화가 어렵고 흐름을 잡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출처 픽사베이
출처 픽사베이

바야흐로 제안서 쓰는 시즌이다. 연중이라고 제안서 쓸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연말이 되면 광고회사는 특히 더 바쁜 나날을 보낸다. 신규 제안은 신규 제안대로 중요하고 방어전은 방어전대로 중요하다. 그래서 이 시즌이 되면 많은 사람이 밤을 새우고 주말에 출근한다. 물론 나는 별로 그럴 일이 없다. 제안서를 쓰는 팀도 아니긴 하지만, 간혹 연중에 독자적으로 제안서를 쓰더라도 회사에서 밤을 새우는 일은 없다.

내가 쓰는 제안서가 통상의 마케팅 대행업체에서 쓰는 제안서와 다른 종류인 이유도 있지만, 나는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밤을 새우지 않고 제안서를 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할 텐데, 혹시 ‘제안서를 잘 쓰는 방법’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얘기의 초점은 밤이다.

먼저 우리는 왜 제안서를 쓸 때 밤을 새우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는 게 없어서일까? 생각나는 게 없어서일까? 후자에 가깝다.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구조화가 잘되지 않아서인 경우가 많다. 흐름이 잡히지 않고 논리적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크다. 흐름이 잡히지 않으니 장표 한 장 한 장을 채울 도식화도 어렵다. 제안서의 파트를 나눠서 생각해 보자. 1파트는 회사소개, 2파트는 전략까지의 논리적 흐름, 3파트는 전략의 실체에 대한 설명과 전술의 상세, 4파트는 예산이나 투입 인력이나 등등. 자 이 중에서 어떤 부분 때문에 가장 많은 밤을 지새우는가? 전략까지의 논리적 흐름을 전개하는 2파트가 1등이고, 다음이 전략의 실체에 대한 설명과 전술을 상세하게 푸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1등, 2등으로 나누기는 했지만, 사실 전략이 뽑히지 않으면 전술이 나올 리 없으니까 최우선 과제는 ‘전략 도출’까지다. (만약 전략이 없어도 전술이 나올 수 있지 않나?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당신이 밤을 새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전략까지의 흐름이 잘 잡히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우선은 시장을 제대로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시장 규모가 어떻다느니, 작년 대비 몇 퍼센트 증가했다느니, 우리 브랜드가 몇 위라느니, 산업 분류상 어떻다느니, 언론 기사에서는 어떻게 다뤄지고 있다느니 하는 부수적이고 단편적이며 홍보성 짙은 이야기들 말고 진짜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 정말 움직이고는 있는지, 독점인지 과점인지, 성장기인지 성숙기인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소비되고 있는지, 습관적으로 소비되고 있는지, 진입 장벽이 낮은지 높은지, 제품이나 브랜드 차원 소비를 할 때 고려 요소가 많은지 적은지, 브랜드가 영향을 미치는지 가격이 영향을 미치는지 등 여러 가지 다양한 각도에서 고려되어야 진짜 시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수많은 질문을 산업 관점, 경쟁 관점, 기업 관점, 브랜드 관점, 마케팅 관점, 소비자 관점 등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세부적으로 구분된 카테고리별로 시장을 본 뒤에 종합적으로 축약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축약된 내용을 보고 다른 시장 대비 어떤 특징을 갖는지, 어떤 위협 요소가 있는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장을 보기 위해서는 내 안에 몇 가지 시장을 보는 기준들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기준들은 오랜 기간을 거쳐 노하우로 축적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럴 시간이 없으므로 남들의 노하우를 가져와야 한다. 어떻게? 책을 통해 가능하다. 소비 시장을 가장 많이 들여다본 사람들이 누구겠는가? 마케팅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자신이 연구해 놓은 업적들을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우리는 그걸 ‘이론’이라고 부른다.

시장을 보는 여러 방법을 정리해 놓고 방법별로 실제 사례를 들어 놓은 책들을 보고 익혀 놓으면 몇 가지 단편적인 시장의 현상들이나 숫자들, 그리고 RFP에 명시된 관점들만으로도 전문가에 꽤 근접하게 시장을 정의하고 진단할 수 있게 된다.

제안서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들이 있다. “구조화가 어려워요”, “도식화가 어려워요” 그리기 어려운 게 아니라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고 의견이 없어서 일 수 있다. “흐름을 못 잡겠어요” 스토리의 부재가 아니라 쓸 말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파워포인트를 붙들고 밤을 새울 때 우리가 하는 대표적인 행동은 페이지의 순서를 바꾸거나, 새로운 페이지를 중간에 껴 넣거나, 껴 넣은 페이지로 다시 순서를 바꾸거나, 그러다가 엉키면 구글링을 통해 새로운 데이터를 찾거나, 그러다가 “준비한 내용을 가지고 한 번 모일까요?”하는 소리에 기겁하는 행동들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구조화나 도식화가 어려워서? 흐름이 잘 정리되지 않아서?

다시 생각해 보자. 당신은 아직 시장을 잘 정의하지 못했고, 그래서 나름대로 진단된 결과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주장하고 싶은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시장을 잘 보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와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갖가지 자료를 통해 시장을 봐야 한다. 그런데 시장의 특성에 따라 집중해야 하는 자료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제안에 참여한 많은 구성원에게 어떤 자료를 찾으면 좋을지 배분해 준 적이 있는가? 이 두 가지 대답에 Yes를 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시장을 제대로 보기 위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제안해야 하는 소비 시장은 아주 복잡해 보이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여서 경험이 많은 사람들만 단번에 시장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장을 보는 이론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장 상황이 몇 가지 유형별로 나뉜다는 얘기이며, 그렇게 나뉜 유형은 생각보다 변화무쌍하지 않다. 적어도 제안서의 흐름을 잡기 위해서라면.

 


박경하 엠포스 데이터전략실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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