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의 컬러 포스터

[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의 컬러 포스터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2.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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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동안 서울 경복궁은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施政5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 회장이 되었다. 영어로는 "The Chosun Industrial Exhibition."

이 행사를 위해 조선 무희가 춤 추는 멋진 포스터를 제작했다. 천연색, 즉 컬러였다. 배경에는 경회루와 회장 일부가 보인다. 반일 보도로 이름난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을 빼고 합병 다음 날부터 조선총독부 국문 기관지가 된 "매일신보(每日申報)“는 연일 이 행사의 보도를 이어 갔다. 물론 전시는 일본의 우위를 보이는 행사였으나, 조선 전국의 각종 생산품을 전시하고 시상까지 하는 행사 이름처럼 “공진” 즉 서로 전진하는 전시회였다.

회장 조감도
회장 평면도

매일신보는 경복궁 공진회 회장의 조감도와 평면도를 큼직하게 실었다. 공진회장의 가장 큰 구조물에는 큼직한 일본말 가타카나로 “카테이하쿠”, 가정 박람회라는 뜻의 글자를 실었다. 신문 기사를 보니 개장 이튿날, 일요일 날씨는 맑고 이날 밤 야경이 놀랄 만했다. 아직 전기는 사치품이던 그 무렵 회장을 전깃불로 밝혔으니, 보도한 기사 헤드라인처럼 “채광의 용궁”이란 과장도 아니었을는지 모른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모든 특집과 부록 기사에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매일신보도 한몫을 벌어야 하니까.

회장 야경 기사

50일 기간 입장자의 수는 1,164,383명 (낮 772,745, 밤 391,638명)이었다. 이 해 조선 인구 1천9십만 명의 10.7%가 공진회 구경을 했다는 계산이 된다. 신문 보도는 이런 입장자 수는 예상의 3배라 보도했다. 이런 공진회에 시상이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진회에 출품 총 25,373점을 심사한 결과 6,965명의 수상자가 있었으니 27%의 시상률이었다. 후한 시상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이 거대한 행사의 이름이 “공진회”이며 조선인의 민심을 달래는 목적도 있었을 터이니까.

입장자, 시상과 수상인원, 개장 선언 보도기사
입장자, 시상과 수상인원, 개장 선언 기사

이를테면 1915년 조선 최대의 Show는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천연색 포스터에 적힌 영어 The Chosun Industrial Exhibition 행사는 즐거운 춤으로 표현할 공진회였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이 영어 번역을 비꼬자면 “시정 5년 기념”이란 말과 “공진회”라는 말은 싹 빠져 있다. 조선은 아직 무단정치 혹은 헌병 정치 시대였다.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헌병이 하던 시기였고 헌병은 즉결권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헌병은 위법 행위라고 판단하면 즉시 현장에서 아무라도 체포해서 처벌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시기였다. “순사 온다”고 하면 젖 먹는 어린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돌던 무렵이었다.

아마 통치자 일본으로서는 이 공진회는 아주 훌륭한 국가적 PR 행사였을 것이다. 전무후무하다고 할 만한 거대한 행사가 5년 전까지 왕궁이던 경복궁에서 개최되었으니, 이제 조선은 틀림없이 일본이 통치한다는 것을 조선인들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한 행사였다.

해방 전 광고물의 작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었다. (지금은 좀 달라졌다지만.) 한국 최초의 107년 전, 이 컬러 포스터 역시 작가를 포함한 작품에 관련된 사람의 이름은 없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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