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서재필 박사는 멋진 기업인이었다.

[신인섭 칼럼] 서재필 박사는 멋진 기업인이었다.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2.06.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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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서재필 박사는 의학 박사이다. 틀림없다. 그는 신문 발행인이다. 역시 옳은 말이다. 그런데 그를 기업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57년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독립신문이 창간한 1896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했다. 이날은 독립신문 창간 61회째 되는 날이었다.

독립신문 창간호 맨 첫 줄, 첫마디가 무엇인지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 듯하다. “광고”이다. 그리고 “값은 일 년에 일원 삼십 전, 한 달에 십이 전, 한 장에 동전 한 푼... 그리고 그다음에 ”무론 누구든지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이, 이 신문을 가져다 놓고 팔고자 하거든 여기 와서 가져다 팔면 열 장에 여덟 장만 셈하고 백 장에 여든 장만 셈함“이라 광고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고쳐서 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괜찮은 벌이였을 것이다.

신문이 성공하려면 많이 팔리고, 또 많이 팔리면 광고 수입이 생겨서 신문사 경영에 도움이 된다. 그 무렵 한국 사람은 아직 광고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 한글 핀에는 한국 광고는 거의 없고 일본인과 미국인의 광고가 있었다. 그러나 영문판에는 지면이 모자라 야단이던 터였다. 창간 이듬해에는 영문판을 분리해서 4 페이지를 냈는데, 광고가 절반 이상이었다. 짭짤한 벌이가 되었다.

이를테면 영문판에서 돈 벌어서 국문판 발행에 투자한 셈이었다. 광고 요금은 많이 그리고 자주 광고를 낼수록 단가를 싸게 하는 Frequency & Volume Discount, 체감(遞減) 요금 제도를 도입했다. 물론 서구의 광고 요금 제도였다. 황성신문과 제국신문도 독립신문의 본을 따랐다.

1899년 6월 2일 자 독립신문에는 광고를 증기에 비유한 긴 해설을 실었는데 일단 물이 끓어 증기의 힘이 생기면 그 힘으로 기차가 가고 기선이 바다를 누비는 것처럼 광고를 통해 일단 일반 사람이 어떤 물건을 알게 되면 스스로 와서 산다는 말이다. 이런 기사를 싣고 광고 요금을 풀이해서 게재했다.

그는 의사일 뿐 아니라 기업가였고 신문사 사장이었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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