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깔때기와 끝말잇기

[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깔때기와 끝말잇기

  • 김시래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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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픽사베이
출처 픽사베이

내러티브(narrative)의 시대다. 데이터나 정보를 인간의 희로애락 속에 담아 전해야 파급력이 크다는 뜻이다. 재미와 감동을 찾는 GenZ의 특성도 거들었을 것이다. 삼 개월 전 한 디지털 미디어 회사로부터 자신들의 회사 제안서에 스토리텔링 기법을 가미하는 교육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효율과 효과를 입증하는 정량적 리포트를 중시하는 그들이라 처음엔 다소 의아했다. 하지만 그 회사 부사장의 어투는 다급했고 진지했다. 세상이 변해 일의 범위가 넓어지니 제안서를 설득력 있게 쓰는 능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애써 가르쳐 놓으면 연봉 많은데로 튈 텐데요?’라고 되물으니 ‘할 건 해야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2명의 간부들과 두 시간씩 열 번을 만났다. 관점과 스토리텔링, 프레젠테이션 기법, 디지털 트렌드와 최신 마케팅, 광고 콘텐츠의 변화와 대응 방안, 광고회사 실전 기획서 리뷰 등을 네 번 강의하고 과제를 내준 뒤 그들의 발표를 다섯 번 클리닉 했다. 발표 원고는 짜고 짜서 진액만 남기는 깔때기이고 문제부터 솔루션까지 이어 달리는 끝말잇기다, 메일로 전송하는 문건이 아니라 발표자의 말을 돕는 글이어야 한다, 보는 문장이 아니라 들리는 문장, 말 같은 문장이어야 한다, 말이 주연이고 글은 조연이 돼야 한다 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려면 배경과 상황 분석은 생략하거나 압축하고 마케팅과 광고 이론을 생활 속 이야기로 바꾸어 쉽고 편안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편지의 흐름과 어투로 훈련해 볼 것을 권유했다. 6월 15일 열 번째 마지막 강의는 본 때를 보여야 했다. 편지를 써서 말로 읽고 원고는 따로 준비해서 화면에 이렇게 띄웠다.

"당초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데이터를 통한 정량적 서술에 길들여진 분들이라 좌뇌가 해야 할 일을 우뇌에게 시키는 꼴이 아닌지 불안했습니다. 일 쳐내기도 바쁘니 불만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달려들었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몇 번은 잘 흘러갔지만 기획서를 써서 발표하라니 난감해하셨습니다. 당연합니다. 구경할 땐 편하지만 하려면 어려운 게 발표니까요. 회가 거듭되며 정량과 정성의 세계가 주고받는 캐치볼이 시작되었습니다. ‘광고비를 나누어 집행하시죠?’를 가랑비에 옷이 젖습니다로 바꾸고,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라는 제안은 ‘텅 빈 교회에선 인간의 영혼을 구할 수 없다’라고 풀어쓰자고 하니 빨간 통유리 바탕의 씩씩한 제안서와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위스키와 함께 먹이자는 솔루션으로 화답했습니다. 광고주에게 러브레터를 보내자는 아이디어와 드라마 더글로리의 스토리라인에 띠로리~라는 징글 사운드가 더해진 티딜 서비스 아이디어까지 탄생했습니다. 파도가 쳐야 모난 돌이 매끄러운 자갈이 됩니다. 오늘 완주의 결실은 서로의 노력도 한몫했겠지만 감정과 감동을 끌어내는 스토리구성 능력은 언제든 필요하리란 자각때문이였을 겁니다. 물론 유능제강의 형식미에 내용의 충실함을 더하는 것은 앞으로 연마해야 할 숙제입니다. 여기에 다른 의미 하나를 덧붙입니다. 인생도 자신의 이야기를 찾는 과정입니다. 일상은 시간과 장소의 데이터로 기록되지만 그 속의 이야기가 기억되고 각인됩니다. 우리의 캐치볼이 샤로수길 돼지구이와 노래방 열창으로 남겨졌듯이 말이죠. 일과 인생은 그렇게 순환합니다. 우리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강의는 그렇게 끝났다. 남은 것은 그들의 자발심이다. 자발심은 자생력의 씨앗이다. 무대에서 맹활약하는 싸이의 공연을 보라. 그의 공연이 지축을 흔드는 비결은 간단하다. 자신이 먼저 빠져든다. 자신의 춤과 땀으로 관객석을 달구니 떼창과 떼춤이 벌어지고 감동의 도가니탕이 되고 만다. 불광불급은 돈벌이가 아니라 좋아해서 스스로 빠져드는 장인의 풍모다. 늙어가는 프리랜서도 하나 깨달았다. 살다 보면 이유를 묻지 않고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하면 된다. 말쑥한 정강이가 아니라 깨진 무릎으로 달려들면 된다. 농심의 신춘호 회장께서 난제에 부딪히면 두 주먹 불끈 쥐고 ‘그래, 해보자, 어디 한번 한번 해보자’라고 하셨던 의미도 그것이었다. 벽을 뚫으면 문이 되고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 어떤 욕심은 진심만큼이나 가치 있고 위대하다.

 


김시래 동서대학교 객원교수, 부시기획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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