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의도와 다른 성공에 대처하는 법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의도와 다른 성공에 대처하는 법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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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항공에 가능한 현대식 작전용 『쩻트』를 유엔군에게 인도하는 조종사에게 미화 오만불을 상급(賞給)하고 또한 유엔지구에 최선(最先)으로 이를 인도하는 조종사에게는 미화 오만불을 가외로 보상할 것이다.’

1953년 4월 20일부로 한국전 당신 유엔군 사령관이자 미국 극동 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가 서명한 전단, 소위 삐라의 핵심 내용이다. 이 삐라는 4월 말에 두 대의 당시 최대의 폭격기인 B-29 두 대에 백만 장 이상이 실려서, 압록강 주변에 살포되었다. 일본과 한국의 라디오 채널을 통해서 북한과 중공 쪽에 대고 소식을 알렸다. 5월에는 삐라 50만 장을 더 뿌렸다. 앞면에는 서유럽에 귀순한 소련 공군 조종사의 사진도 설명과 함께 싣고, 뒷면에는 ‘6,100미터 고도로 김포 비행장으로 접근해 바퀴를 내리고 선회’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백령도 쪽으로 가라는 등 자세한 비행경로와 안내문이 있었다.

<위대한 독재자와 전투기 조종사> (블레인 하든 지음, 홍희범 옮김, 마르코폴로 펴냄, 2023)의 저자는 1953년의 미화 10만 달러가 지금으로 치면 90만 달러 정도라고 한다. 1인당 GDP나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수치로는 그럴지 몰라도, 심리적 가치는 다르다.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 선수가 받는 연봉이 그 정도였다. 예를 들면 최후의 4할 타자인 테드 윌리엄스와 56경기 연속 안타의 조 미다지오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연봉이었다. 테드 윌리엄스는 1949년에 연봉 10만 달러, 1959년에 12만 5천 달러 연봉을 받았는데, 계속 메이저리그의 최고 연봉자였다. 지금 뉴욕 양키스의 투수인 개릿 콜은 일 년에 3천6백만 달러를 받는다. 물론 이것도 일대일 비교는 문제가 있지만, 지금의 90만 달러보다는 훨씬 큰, 보통 사람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금액이었다는 얘기다.

‘물라 작전(Operation Moolah)’이라는 이름의 이 계획은 길고 긴 한국전 휴전회담이 1953년 봄에 재개되던 바로 그날에 공개되었다. 한국전 휴전 협상을 위한 회담은 1951년에 시작되었으나 서로 꼬투리를 잡고, 이념 대결 말싸움이나 벌이며 중지와 재개를 반복하는 지지부진한 상태가 2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판문점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둔 피곤한 심리전이 계속되는 동안, 땅 위에서는 일차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참호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처참한 살육전이 무의미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유엔군 측이 잡고 있던 제공권에 일어났던 균열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한국전 초기에 북한군이 압도적으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지만, 하늘에서는 유엔군이 거의 아무런 방해도 없이 활동하고 있었다. 소련이 1951년 10월에 최신예 미그 15기를 투입하면서 상황이 바뀌는가 싶었다. 그달에만 B-29 8대가 격추되고 55명의 미국 공군이 전사했다고 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흔히 제로센(零戰)이라고 하는 일본 전투기에 대한 공포와 유사한 분위기가 퍼졌다. 그러나 초기 공중전을 책임졌던 소련의 베테랑 조종사들이 빠지고 북한과 중공의 미숙련 조종사들이 대신 나서고, 생산 과정에서의 품질 불안정으로 작동 불량을 보인 미그 15기가 숱하게 나타나고, 약점을 분석하여 파고들며 미군 주력기인 F86 세이버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그래도 심리적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1953년 4월에 공산 진영의 절대 군주 격인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했다. 휴전을 향한 큰 걸림돌이 제거되며 회담도 재개될 수 있었다. 적진의 혼란을 더 부추기고자 하는 의도에서 물라 작전이 실행되었다고 당시 삐라에 서명한 클라크는 말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1953년에 한 종군기자가 그와 함께 위스키를 마시며 이 아이디어를 떠올려 공군 장성 하나와 허구의 인터뷰를 하는 기사 속에 끼워 넣었던 게 도쿄의 공군 사령부를 거쳐 워싱턴까지 보고되어 허가를 진행되었다고 썼다. 종군기자로 등장한 이의 기억은 다르다. 1952년 가을에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마크 클라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망명한 조종사에게 미국 이주와 보상금을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말했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의 공군 심리전 부서는 ‘미그기를 가지고 귀순하면 1만 달러의 포상금을 준다’라는 내용을 입소문으로만 퍼트릴 계획을 세웠는데, 그게 잘못 퍼져서 부풀려졌다고 했다.

물라 작전이 실행되고 5개월에, 휴전협정 서명 2개월 후인 1953년 9월 21일에 북한 공군 상위였던 노금석이 미그 15기를 몰고 평양 순안비행장을 떠나 김포공항으로 13분 만에 도착해 귀순했다. 실제 귀순자가 나타나면서 아이디어의 입안자라고 공로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성공한 광고에는 아버지가 많다’라는 광고계의 오랜 속설 중의 하나가 군대의 작전에도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노금석은 물라 작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전단을 보거나, 관련한 방송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함께 일했던 이들과의 대화에서도 전혀 언급된 적이 없다고 한다. 물라 작전의 기안자임을 주장한 이들은 작전의 의도 방향을 살짝 틀었다. 대표적으로 클라크는 작전의 목적이 ‘적을 피곤하게 만들고 적 지휘관들 사이에 불신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작전 개시 이후 공산 진영에서 귀순할 가능성이 있는 노련한 조종사들을 전투에 내보내지 않아서 미군의 격추율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역시 의도와 달리 성공한 광고에서 많이 보는 풍경이다.

1953년 4월20일 자로 마크클라크 당시 유엔군사령관 서명이 담긴 물라작전 ‘삐라’
1953년 4월 20일 자, 마크 클라크 당시 유엔군사령관 서명이 담긴 물라 작전 ‘삐라’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이화여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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