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한국최초의 신문이 일본어 신문이었다고? 그래서...

[신인섭 칼럼] 한국최초의 신문이 일본어 신문이었다고? 그래서...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3.05.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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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한국에 처음으로 신문이 나타난 것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어 신문 “조선신보(朝鮮新報)”였다. 1~4호는 없으므로 역산해서 추정한 창간일은 1881년 12월 10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이 신문 복사판이 우리나라에서 인쇄되어 나온 것은 1984년 6월 10일로서 한국 고서동우회(古書同友會)가 5호에서 12호까지 8호를 출판한 뒤였다. (조선일보 84년 5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출판 전인 84년 6월 1일부터 고서동우회 <개화기 도서전>에서 공개되었다.) 그러니 창간 103년 뒤에야 실물을 보게 되었다.

조선신보 1882년 4월 15일 제5호 표지
조선신보 1882년 4월 15일 제5호 표지

해방 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메이지 유신 잡지 문고에 깊이 보관되어 있던 자료를 겨우 입수해다가 복사, 출판한 것이다. 부산에 있던 일본인 상법회의소(商法會議所. 상공회의소)가 발행했는데, 주로 경제 관련 기사가 위주였다. 1882년 4월 15일(음력 2월 28일) 제9호 19, 20페이지에는 첫 광고가 게재되었다. 9호 내용에는 제호 다음 면에 아래와 같이 목차 즉 차례가 나와 있다.

조선신보(朝鮮新報)에는 관세에 관한 기사와 그 밖에 주요 보도가 있다.

잡보(雜報)란 대개 사화, 문화 관련 기사가 제재되었는데, 순 한문 그리고 일본 히라가나로 되어 있다. 일본의 정책을 대변하는 정치적 기사도 있다. 일본을 포함한 외국과의 개항에 반대하는 수구파의 태도를 비난하는 보도가 일본어와 한글로 동시에 게재한 (그림 3) 내용을 현재 한글로 고치면 다음과 같다. “근래 조선 완고당은 다시 세력을 얻어 앞서 일본과 화친하던 약조를 거절함 만 같지 못하다고 대단히 요란한 모양이나 차라리 속히 큰 사홈을(?) 시작하면 도리어 개화도 하고 또 양국 국교에도 옛날보다 후히 될까 생각하노라.”

잡보란에 보도된 한문과 히라가나 기사
잡보란에 보도된 한문과 히라가나 기사

부산 상황(釜山商況)은 신문이 발행되는 부산항의 상업 상황을 다루었다. 기서(寄書)는 그 이름 같이 외부 인사의 기고문이 게재되어 있다. 물가표(物價表)에는 수입, 수출하는 국내, 외국 각종 제품의 가격이 나와 있다.

수출입 물가표
수출입 물가표

광고는 마지막 19, 20페이지인데 1페이지와 4줄의 퍽 큰 약 광고가 게재되었다. 광고주는 대마도(對馬島)에 있으면서 부산에 진출한 회사 30가지가 넘는 각종 의약품을 판매하는 약국이다. 퍽 긴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다.

천금단 발매 병 제국 묘약 대취차 판매 광고(千金丹 發賣 並(및)諸國妙藥大取次(크게 취급)販賣廣告)

그림은 없고 글자뿐이다. 이 광고 다음에 광고 요금이 나오는데, 한문은 생략하고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게재 횟수가 5호까지로 되어 있으나 광고 수의 증가에 따라 광고료가 할인되는 체감요금(遞減料金) 제도이다. 아마도 1854년 일본이 개항된 이후 개항 항구인 요코하마에서 영어신문이 발행되면서 그 광고료 제도를 본뜬 듯하다. 할인율은 다르나 신문 구독료도 할인이 있다. 즉 서구식 합리적인 광고료 및 구독료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1896년 서재필 박사의 독립신문은 체감 요금제를 채택했다.)

  • 4호 문자 한 줄 25자(字) 1회 게재에 3전
  • 4호 문자 한 줄 25자 2회 개재에 4전
  • 4호 문자 한 줄 25자 3회 이상 5회까지 5전
대마도 제약회사 광고
대마도 제약회사 광고

그런데 이 체감 광고료 제도는 1910년대 초가 되면 사라지고 광고량이 많은 업종에 따라 광고주와 신문사가 비밀로 정한 단가제로 바뀌게 된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일본 신문 광고료가 업종별, 광고주별 비밀 단가제로 바뀌는 낙후된 관례는 1960년대에 가서야 체감 요금제도로 복구하게 되었다. 그 자극이 된 것은 라디오와 TV의 등장이었는데 전파 광고는 활자 매체와는 달리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같은 광고를 되풀이할 수 있는 매체이다. 이런 매체 특성상 여러 차례 광고하는 광고주에게는 할인제를 제공하는 미국의 관례가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민방이 일본에 도입된 것은 1950년대였다. 광고 수입이 급속히 전파 매체로 확산하고 산문, 잡지 광고 영향을 미치게 되자, 그 대안으로 신문이 체감 광고료 제도를 도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본은 민방 도입 시기에 신문사도 전파 매체에 진출하게 허용했다.

1910년 국권침탈 후 1920년에 창간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은 합리적인 서구 신문광고의 체감 요금을 몰랐고 잘못된 비밀 단가제인 일본 제도를 따랐다. 또한, 아무도 서재필의 독립신문과 배설의 대한매일신보의 선진 서구식 광고료에 대해서 몰랐고 연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체감 요금제도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체감 요금제 도입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일본 신문이 비밀 단가제의 모순을 깨닫고 체감 요금제도로 바뀌는 데에는 아사히신문이 선두에서 컨센서스를 이루는 퍽 힘들고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한국신문연구소 윤임술(尹任述) 소장의 통찰력 깊은 배려로 1975년 4월 7일 <신문의 날>에는 일본 아사히(朝日. Asahi) 신문 광고 담당 임원이며 신문협회 광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오카모토(岡本) 상무를 특별 연사로 초청한 강연이 있었다. (윤임술 소장은 내게 적당한 인사 추천을 요청했다. 나는 신문 발행 부수 ABC 공사 제도와 체감 광고요금 제도 시행에 이론가이며 실천가인 아사히 신문 오카모토 상무를 추천했더니 쾌히 승낙해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이었다.) 이 강연회는 한일 신문 교류 행사 중 처음으로 신문 경영 문제를 다룬 행사였다. 이 강연의 통역과 강연 내용 번역은 내가 밭았다. 1970년대 한국의 신문이 당면한 경영과 관련된 문제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일보(한국경제신문)/일요신문 광고부장으로 쓰라린 경험을 겪은 내 4년간의 광고부장 경험이 바탕이 되었는데, 오카모토 상무에 관한 내용은 서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오카모토 상무 연설 세미나 관련 자료
오카모토 상무 연설 세미나 관련 자료

신문 경영의 기본이 되는 발행 부수 공표는 1989년 한국 ABC협회가 창립되고 20년 후에 전국 모든 일간신문의 공사 부수가 공개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간단한 듯한 신문의 발행, 판매 부수를 공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한국 ABC가 겪은 과정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ABC 부수 공개는 한 나라 언론 성숙도의 척도이며 한국언론사상 기념비를 이룬 사건이었다. 그러나 뒤를 이었어야 할 체감 요금제도는 아직 미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141년 전인 1882년 4월 15일 부산에서 일본 상공회의소가 발행한 조선신보 5호에 게재된 일본 대마도 제약회사의 약 광고는 보기에 따라서는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조선일보 1984년 5월 29일 <희귀본 잔치 개화기 도서전> 기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일보 보도
조선일보 보도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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