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삼국지 주인공 관우의 이미지 반전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삼국지 주인공 관우의 이미지 반전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0.03.0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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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관련 서적으로 최고의 판매를 기록하고 있는 <삼국지 강의>에서 이중텐(易中天) 교수는 '역사적 사건'과 '역사 속 인물'들은 세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첫째는 정사(正史)에 기록된 얼굴이다. '역사상의 이미지'로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도 엄밀하게 얘기하면 실제 벌어졌던 일, 바로 '역사의 진상(眞相)'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역사가들이 선택하여 기록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정사를 기록하는 사관들부터, 추후의 역사가들의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소설과 희곡을 포함한 문예작품 속의 얼굴로 바로 '문학상의 이미지'이다. 당연히 특정 인물에 대한 극적인 과장이나 폄하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작가의 상상이 관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일반 백성들이 주장하거나 염원하는 모습인 바로 '민간의 이미지'이다.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바람이나 호오(好惡)를 담다 보니 이중텐 교수는 개개인의 마음 속에 모두들 한 권의 '족보'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관우
관우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위에서 얘기한 세 가지 이미지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아마 관우(關羽)일 것이다. 정사 속에서의 관우는 촉한(蜀漢)을 세운 유비(劉備)와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장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넘어 오면 관우는 충의(忠義)의 상징으로 독자들의 피를 끓게 하거나 한숨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를 가장 많이 보여 주는, 실질적인 주인공 역할을 한다.

나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여섯 권으로 된 <소년삼국지>로 삼국지 순례를 시작했는데, 4권에서 관우가 죽으며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느라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이후 5권에서 제갈량(諸葛亮)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했다(死孔明走生仲達)'의 전설을 만들며 숨을 거둔 이후는 오직 완독을 목표로만 읽다시피 했다. 관우가 죽으면서 삼국지 책을 덮고 더 이상 읽지 않았다는 사람도 많이 봤다. <남한산성>의 소설가 김훈 선생이 작가이자 번역가이기도 했던 자신의 부친 김광주 선생을 삼국지와 관련하여 회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부친이 삼국지에서 관우의 죽음 부분을 번역하고는 한동안 시름에 잠겼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삼국지에서 관우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문학상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개인적인 관심사나 인생의 바램을 관우와 결부시키며 숱한 무당들의 수호신으로, 비밀결사의 원조로, 재물을 가져다주는 재신(財神) 등 민간의 최고 인기스타로 관우의 세 번째 이미지가 완성이 된다. 억울하게 배신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한 인물들이 무당의 수호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순수 한국 출신으로는 임경업과 남이 장군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해외 출신으로는 관우에다가 한국전에서 부당 해임 당했다고 맥아더를 모신다는 무당들도 꽤 된다. 비밀결사는 관우의 일편단심 충의를 높게 사서 모신다고 한다. 배신하지 말고 조직에 충성을 다하라는 뜻이다. 상인들이 모시는 건, 그가 조조 진영에 있었을 때 받았던 재물들을 모두 반납한 데서 신의의 상징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서울에도 아직까지 관우를 모신 사당이 있다. 서울의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역 중에 ‘동묘앞’이 있다. 동묘의 원래 이름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그러니까 서울에 이전에는 동서남북에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가 네 군데 있었다고 한다. 동묘 담을 끼고 상설 벼룩시장같은 동묘구제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군신에서 재신으로 반전의 변모를 한 관우의 이미지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까.

서울 동관왕묘 (출처 위키피디아)
서울 동관왕묘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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