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의 신문 광고: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고백(告白)」- 그 번역

[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의 신문 광고: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고백(告白)」- 그 번역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3.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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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a. 한성주보 표지와 세창양행 광고
그림 1a. 한성주보 표지와 세창양행 광고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37년 전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漢城周報) 제4호에 독일 상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이 게재한 두 페이지에 걸친 광고를 내가 우리말로 번역한 뒷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좀 고생했다. 간단하나마 그 배경을 글로 남겨 두고자 한다.

서울시가 발행한 한성주보는 그 제호대로 주간 신문이다. 이 주간 신문의 인쇄된 부분은 가로 15cm, 세로 20cm 크기이다. 한성순보와는 달리 한문과 한글을 섞어 쓴 신문이다. 세창양행, 영어로는 E. Meyer & Co.인데 광고는 15페이지에 4줄 89자, 16페이지에 20줄 235자, 글자는 모두 한문이며 합계 324자이다.

광고의 내용에는 한국에서 사 가는 물건, 이를테면 수출과 외국에서 들여다 파는 물건 즉 수입품의 이름이 나와 있다. 광고 첫 줄은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이다. 19세기 말에는 한국, 중국 일본 할 것 없이 모두 광고를 고백이라고도 불렀는데 동양 3개국 공통 용어였다. (광고라는 말은 일본에서 19세기 후반에 사용하기 시작해서 조선과 중국으로 퍼졌다.)

그런데 내가 이 세창양행 광고를 알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한국의 광고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된 무렵이었다. 나는 1965년에 지금의 한국경제신문, 그때에는 현대경제일보와 일요신문(지금의 일요신문과는 다른 신문) 광고부장이었다. 우리나라 광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해방 20년이 지났음에도 신문사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수두룩한 일본 말 때문이었다. 또 다른 자극은 미국에서 1929년에 발행된 광고의 역사책을 알게 된 때문이었다. 한국 광고사를 쓰기로 작정한 것은 70년대 초 뉴욕에서 돌아와 호남정유(GS Caltex) 광고 책임을 맡은 뒤였다. 대략 6년쯤 걸려 일단 한국의 광고 역사책 초고를 준비했다. 이 연구에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1976년 8월에 일본 최대의 광고회사인 전보통신사(Dentsu)가 발행한 「일본광고발달사 상권」이었다. ‘77년에는 최준 교수의 한국신문 역사책이 나왔고 또한 정진석 교수가 쓴 한국 언론사 글을 알게 되었다. 최 교수의 책에는 극히 일부나마 광고에 언급한 것이 있었다. 직접적인 도움은 동아일보사가 발행한 해방 전 동아일보 축쇄판이었다.

그리고 가장 생생한 신문 광고 거래 현장의 상황을 알게 된 것은 1979년 1월 초의 일이었다. 해방 전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승리와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9개월간 무기 정간을 당한 후 복간 때 일본에서 동아일보 광고 복구를 한 김승문(金勝文) 선생을 만난 일이었다. 김 선생이 동아일보 동경 지국장 시절인 1937년 후반의 경험담은 한국 신문사(史)에 남겨야 할 소중한 기록이었다. 동경의 일본 신문 광고 거래를 둘러싼 관행은 고스란히 조선에 들어맞았다. 1965년 내가 현대경제 광고부장으로 있으면서 겪은 일은 김승문 선생이 1930년대 후반에 동경에서 겪은 일의 축소판이었다.

1980년에는 고맙게도 일조각에서 내가 쓴 「韓國廣告發達史. 한국광고발달사」를 발행해 주었다. 다만 이때에도 세창양행 광고는 우리말로 옮기기 전이었다. 번역을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선 뒤였는데 본업이 있어서 더뎠다. 동아출판사의 한한대사전 (漢韓大辭典)을 뒤적거리며 애벌 번역을 했다. 그러나 1984녀 6월에 한국 최초로 주최한 국제광고회의인 14th Asian Advertising Conference 사무총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받고 거의 1년간은 다른 일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그림 1 b. Dennis Chin이 수정한 부분. 빨간 줄 친 곳
그림 1 b. Dennis Chin이 수정한 부분. 빨간 줄 친 곳

다행하게도 이 회의가 끝난 뒤 만난 사람이 Dennis K. Chin(秦凱. 진개)이었다. 장개석 총통이 대만으 후퇴할 때 같이 가서 광고회사를 차린 분이었다. 전직은 미국 방송국의 중국 특파원이었고 아편전쟁 이후 중국 광고의 중심지가 된 상해 출신이었다. 세창양행의 이 광고가 상해말이라는 것은 Chin 사장을 통해 알았다. 그가 도와준 기록은 그림 #1b에 일부를 실었는데 빨간 밑줄이 그가 도와준 영문 번역이다. 그와 주고받은 서신 가운데 1984년 11월 7일의 영문 편지가 그림 #2이다.

그림 2. Dennis Chin의 1984년 11월 7일 서신
그림 2. Dennis Chin의 1984년 11월 7일 서신

서울의 아시아광고회의가 회의가 끝난 1984년 6월 후에는 다시 타이베이에서 보인(輔仁) 대학에서 은퇴하고 대만 광고대행사협회 고문으로 있는 유의지(Y.C. Liu. 劉毅志) 교수와 Dennis Chin을 만나 세창양행 광고에 관한 자문을 받았다. 그 결과 1986년 4월에 도서 출판 나남에서 출판한 「韓國廣告史(한국광고사)」 1차 개정판에 한국 최초의 신문광고 세창양행이 게재한 광고를 번역해서 발표했다.

다시 5년이 지난 1991년에는 중국 현대광고의 태두로 존경받는 서백익(徐百益. Xu Bai Yi) 선생의 검토를 받았다. 때마침 북경에서 개최한 중국 제1차 국제광고회의 기간 중 5월 11일에 나는 서백익 선생을 세 시간쯤 만났는데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 주셨다.

그림 3. Xu Bai Yi 저. The Role of Advertising in China
그림 3. Xu Bai Yi 저. The Role of Advertising in China

1911년 상해 출생으로 자수성가한 광고인이며 중국 광고사가(廣告史家)이기도 한 Xu Bai Yi 선생은 1930년대에 광고 현업에 종사한 사람으로 영어를 터득했다. 1966-1976년의 문화혁명 기간에 그는 이른바 하방(下放)에 걸려 시골로 쫓겨났고 부인을 잃기도 했다. 덩샤오핑의 대두와 함께 광고가 부활하고 상해에 돌아와 광고 부흥에 전력을 다했다. 1989년 11월에 15일에는 일리노이 대학 광고학과에서 그가 발표한 "The Role of Advertising in China"는 미국에 소개된 최초의 중국 광고 관련 논문이었다. 그는 “A Brief History of Advertising in China"도 발표했다. (그림 #3 및 #4).

그림 4. Xu Bai Yi 저 A Brief History of Advertising in China 제목과 차례
그림 4. Xu Bai Yi 저 A Brief History of Advertising in China 제목과 차례

1992년에는 상해광고협회가 80세를 맞은 서 선생에게 「서백익 광고 문선. 徐百益 廣告文選」을 출판해서 증정했다. 고맙게도 서명한 이 책을 내게 보내 주셨다. (그림 #5). 이 책자에는 그가 써서 발표한 자료가 모두 나와 있다. 이 소책자는 1976년 덩샤오핑의 「改革 開放 개혁 개방」 이후 중국 광고 부활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림 #6).

상해시 광고협회(上海市 廣告協會)가 증정한 소책자 표지 및 필자에게 증정한 기록
상해시 광고협회(上海市 廣告協會)가 증정한 소책자 표지 및 필자에게 증정한 기록
그림 6. 1991년 5월 북경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 광고대회장에서 Xu Bai Yi와 필자
그림 6. 1991년 5월 북경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 광고대회장에서 Xu Bai Yi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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