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里仁〕 그 이름이 명심(銘心)해야 할 무게

〔카페★里仁〕 그 이름이 명심(銘心)해야 할 무게

  • 장성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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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은 겨울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바람결에 간간이 느껴지는 온기는 봄을 어김없이 알려온다. 그러면 산언덕 숲에서 들에서 거리에서 생명의 숨결이 일렁이며 힘차게 자신의 모습을 뽐내려 싹을 움틀 것이다.

봄이오면 겨우내 언 땅이 스르르 녹으며 따사로운 햇살과 더불어 대지에 새 생명을 길러내 듯, 우리의 인생에서 사람을 길러내는 존재 중에 하나는 교육자다. 그들은 부모와 함께 한 인격체를 육성(育成)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에 남다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단지 지식 전달자의 수준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성(人性) 함양(涵養)을 위한 교육을 병행(竝行)해야 하는 역할이며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제법 긴 시간 교육을 받는 가운데 성장하며 지식과 품성(品性)을 쌓아가고 받으면서 지혜도 얻게 되고 전인격(全人格)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서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요구되는 도덕적(道德的) 기준은 남다르고 더욱 엄격하다. 이 교육자의 기본적인 덕목(德目)은 어느 지역 어느 한 시대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인류 공동체가 존재하는 곳이면 누구나 기대하는 보편적인 희망사항이다.

선생이 되려면 네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학식이 넓고 많이 배운 것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존엄하며 경외심을 품게 하면 선생이 될 수 있다. 나이가 어느 만큼 되고 신뢰를 주면 선생이 될 수 있다. 경전을 읽고 해설을 하면서 그것을 어기지 않고 범하지 않으면 선생이 될 수 있다. 사람됨의 세심한 도리를 알고 설명 할 수 있으면 선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이 되려면 이 네 가지를 갖추어야 하고 박학이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師術有四,而博習不與焉:尊嚴而憚,可以為師;耆艾而信,可以為師;誦說而不陵不犯,可以為師;知微而論,可以為師;故師術有四,而博習不與焉. 《荀子•致士》)

그런데 우리가 용납(容納)할 수 없는 개인의 탐욕(貪慾)스런 이득을 취하려 선생님 교수님 하는 이름을 달고서 사회적 큰 파장을 일으키며 수년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던 몇몇 비교육적인 사건의 판결이 최근에 다 내려졌다. 숙명여고 교사의 사건도, 한때는 나랏일을 한다며 정치권의 실세의 자리를 누리던 조국 교수 부부의 사건도 모두가 자기 자녀의 인생을 위해 소위 자기 업종(業種)의 도(道)도 지키지 않고 내던지며 거짓과 허위 날조(捏造)를 거침없이 시도하며 양심(良心)에 화인(火印) 맞은 듯이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던 교육 비리(非理)가 법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일단 이런 판결은 분명 우리 사회 구성원에게 경종(警鐘)을 울렸다. 그런데 남의 선생의 자리에 있으면서 지금도 어디선가 어처구니없는 획책(劃策)을 누군가 도모(圖謀)하려 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행(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스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혹시 선생이라는 신분을 망각(忘却)한 채 남모르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숨겨진 채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안도하며 사욕(私慾)을 계속 탐하는 자질(資質)을 상실한 눈먼 교육자가 있다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불의를 멈추라.

오늘도 그 직분(職分)을 잘 감당(堪當)하려 사사(私事)로운 계산은 다 내려놓고 충실하고 무던하게 교육하며 성실하게 의무(義務)를 실천하고 있는 많은 동료들의 수고와 명예를 더 이상 더럽히거나 짓밟지 말고 부끄러운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떠나라.

Photo by Alexander Grey on Unsplash
Photo by Alexander Grey on Unsplash

 

 


장성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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