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그림 한 점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그림 한 점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3.07.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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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li me Tangere (출처 내셔널 갤러리)
Noli me Tangere (출처 내셔널 갤러리)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해외에서 처음 가 본 미술관이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였다. 촬영 출장을 갔는데, 본의 아니게 혼자서만 런던을 즐길 수 있는 하루가 주어져 넬슨 제독의 동상을 보러 트래펄가 광장에 갔다가, 바로 앞에 있는 미술관 안내판을 보고 별생각 없이 들어갔다. 서구의 유명 미술관에 간 이들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미술 교과서에서 본 작품들을 실물로 본다는 자체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런 흥분이 조금 가라앉으며 후반부에는 제법 여유를 가지고 그림들을 나름 감상했다. 이후 다른 미술관들도 꽤 다녀 보았지만, 처음 내셔널 갤러리에서와 같은 안정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어느 부분에서인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이후 런던에 가면 꼭 내셔널 갤러리에 들렀고,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전문가 수준의 미술 식견을 가지고 있는 선배 한 분에게 그 얘기를 하자, 내셔널 갤러리가 크기를 떠나서 전시/관람 환경이 가장 뛰어난 미술관으로 꼽힌다고 했다. 조명, 전시물의 높이와 간격, 전시실의 넓이, 동선 등이 편안하고 쾌적하면서 작품에 집중할 수 있게 잘 짜였다고 한다.

지난 5월 런던의 D&AD 광고제에 갔을 때는 런던에서 들르지 못했던 부분들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녔는데, 내셔널 갤러리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들르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 아쉬움을 달래 주려고 했는지, 6월 초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람을 향하다-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의 티켓이 있다면서 한 친구가 초대했다. 집중호우가 내려 10분 단위로 행정안전부나 구청에서 ‘안전 안내 문자’가 오는 가운데, 세찬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전시회에 갔다. 시간 단위로 예약을 받았는데, 적정 수준보다 입장객 수가 많은 느낌이었다. 이전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누렸던 쾌적한 관람이 되기는 힘들었다.

르네상스 직후의 성화(聖畵)에서 <일상 예찬>(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이은진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2003> 책에 잘 실렸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19세기 인상파까지의 작품들이 잘 추려졌다. 그러나 북적이는 전시실에서 그림 안내문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겨우 보니, 오로지 그림에 집중하며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림보다 전시실 사이사이의 큰 스크린에서 보여준 새로운 물감의 출현과 작가들에 미친 영향, 내셔널 갤러리의 역사를 담은 동영상들이 더욱 눈길을 끌며, 흥미로웠다. 특히 내셔널 갤러리가 런던 중앙에 있어, 서쪽의 돈 많은 이들이나 동쪽의 가난한 이들 모두 방문하기 쉬웠다는 설명이 나온 영상이 있었다. 6월 런던에 갔을 때, 내가 머물던 곳이 인도와 파키스탄 등의 서남아시아와 아랍 지역의 이주민들이 주로 사는 이전부터 빈민가였던 동북부 지역이었다. 그러니 아나키즘협회의 본부가 오래도록 자리를 잡고 있기도 하다. 괜히 우리 동네 이야기를 해준 양 반가웠다.

관람 동선상 마지막 방이었던 인상파 전시실 직전의 동영상 감상실에서는 이차세계대전 때 내셔널 갤러리에서 벌어졌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유럽대륙으로 갔던 영국 원정군이 덩케르크 항구에서 겨우 빠져나온 후에 나치 독일 공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무차별 폭격 속에 내셔널 갤러리에도 언제 폭탄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연히 소장 예술작품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했던 2천 여점의 예술품들이 웨일스 북쪽 소재 폐광으로 옮겨졌고, 갤러리는 문을 닫았다. 그런데 1942년 영국을 대표하는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력지 ‘더 타임스(The Times)’의 독자투고에 이런 제안이 실렸다.

“처절한 전쟁 중이지만 내셔널 갤러리가 예술을 그리워하는 국민을 위해 1∼2점의 작품을 선정해 전시하면 어떨까”.

정부와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여, 전쟁 중에 매달 한 점의 작품을 입구 계단 위에 전시했다. 그 한 점을 감상하기 위하여 하루에 수천 명의 사람이 내셔널 갤러리를 찾았다. 그때 첫 작품으로 16세기 이탈리아 거장인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1514년작인 ‘Noli me Tangere'가 선정되었다. 영어 제목은 ‘Don’t touch me’로 한글로는 ‘나를 붙들지 말라’라고 한다. 부활한 예수를 막달라 마리아가 보고 손으로 확인하려고 하니, 나를 잡지 말고 사람들에게 가서 부활을 알리라는 요한복음의 구절이 소재가 되었다. 나치 독일의 포격 아래 신음하지만, 영국은 굴복하지 않고 떨치고 이겨낼 것이란 메시지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단 한 점의 작품이 어찌 보면 2천여 점의 작품들만큼이나 큰 울림을 만드는 반전을 일궈냈다. 전쟁 후에도 내셔널 갤러리는 ‘이달의 작품 Picture of the Month’를 선정하여 발표하는 것으로 이 전통을 이어갔다. 또 하나의 스토리가 내셔널 갤러리의 브랜드에 더해진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중 내셔널 갤러리 입구에 전시된 'Noli me Tangere' (출처 내셔널 갤러리)
2차 세계 대전 중 내셔널 갤러리 입구에 전시된 'Noli me Tangere' (출처 내셔널 갤러리)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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