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의 광고회사 한성광고사(漢城廣告舍)의 111년 전 신문광고

[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의 광고회사 한성광고사(漢城廣告舍)의 111년 전 신문광고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0.10.21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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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한 달 전, 한성광고사라는 회사의 “제신문 잡지 광고 취급(諸新聞雜誌廣告取扱)”이라는 자그마한 광고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게재되었다. 동그라미 테두리를 만들어서 눈에 뜨이게 만든 광고이다. 주소는 외상사동 25통 10호이다. 설멍할 필요도 없이 여러 신문과 잡지에 광고 대행을 한다는 내용이다.

위: 1919년 7월 7일 대한매일신보. 아래 왼 쪽부터: 1911년 6월 27일, 7월 6일, 7월 12일 매일신보
[그림 1] 1919년 7월 7일 대한매일신보 (위) / 
1911년 6월 27일, 7월 6일, 7월 12일 매일신보 (아래 왼쪽부터)

그런데 이 회사는 그 뒤 한일합병 후 “대한”이 빠지고 그냥 “매일신보(每日申報)”로 되어 일본총독부 국문 기관지가 된 신문에 광고를 여러 차례 게재한다.

달라진 것은 광고가 조금 더 커진 것과 주소 변동, 전화가 생긴 일 그리고 업종이 신문 잡지 광고 취급이 아니라 금고판매, 유성기(축음기), 은행, 화사 주권 매입으로 바뀐 것이다. 아마도 바뀌었다기보다 그런 사업을 추가했다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다른 것은 몰라도 1910년에 전화가 있다는 것은 큰 회사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면 광고대행은 그만 두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한성광고사가 발기(發起)한 부록 광고에서 나타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10년 9월 27일 두 페이지 광고와 11월 29일의 광고이다. (아마 찾으면 더 있을 것이다.)

[그림 2] 1910년 9월 27일 매일신보 부록으로 게재된 광고 모음 및 <경성 종로 광고판 제조점>의 광고
[그림 3] 191년 11월 29일 매일신보

[그림 2]와 [그림 3]의 부록이라 부른 전단 같은 광고 우측 상단 테두리 밖에는 손가락 그림 옆에 “발기자 한성광고사(發起者 漢城廣告)‘라는 글이 있어서 이 여러 광고를 모아 신문에 부록으로 게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에 1단 광고를 게재함과 동시에 광고주를 설득해서 특집 부록을 게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에 빨간 줄 친 광고는 경성(서울) 종로에 있던 광고판 제조점이라는 간판 광고회사의 광고가 있다. ”본점에서 각종 광고판을 제조함“이라는 말 다음을 보면 각색, 미술 자형(字形), 미술 광고판, 미술 인형 등도 제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비술사를 데리고 와도 무방하다는 말과 지방에서 주문하는 경우 운송부로 대금을 보내도 된다는 말이 있다.

1897년 서재필 박사가 독립신문을 창간한 뒤 신문광고 요금 제도는 서구식으로 광고량과 게재 빈도에 따른 단가 할인제(Volume & Frequency Rate)가 관례로 정착했다. 그것은 독립신문 뿐 아니라 황성신문, 제국신문의 광고요금 발표에서도 같은 제도였음이 나나타고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한국어 기관지가 된 매일신보의 광고 요금표도 합병 후 2여년은 서구식 제도였으나, 1913년부터는 광고주별로 비밀단가 제도로 바뀌었다. 즉 낙후된 불합리한 일본식 제도로 변화한 것이다. 한국의 신문이 여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광고요금 제도는 일제시대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은 이미 1960년대 이래 줄곧 합리적인 서구제도를 본따서 이제는 광고주별 비밀단가제는 옛말이 되었다. 물론 당사자인 신문의 역할도 있었으나, 이런 변화의 선두에는 광고회사가 있었다.

한성광고사는 이제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광고회사가 남긴 교훈이 있다면 우리도 일제시대에 어엿한 광고회사가 있어서 일본 바깥 광고의 세계를 내다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한성광고사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다.)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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