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지금도 심심치 않게 TV에서 방영하는, 명화의 반열에 오른 인도 영화인 <세 얼간이(Three idiots)>는 인도 최고의 공과대학이 무대이다. 학생들을 몰아치는 ‘바이러스’라는 별명의 학장이 인생은 레이스라 빨리 달리지 않으면 짓밟힐 것이라며 일장 훈시를 하다가 자신의 포켓에 있는 펜을 끄집어내서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만년필이나 볼펜은 지구 밖에서는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게 수백만 달러를 들여 개발한 펜이다. 이 펜은 각도, 온도, 중력 모두 상관없이 쓸 수 있다.”
그 펜을 바이러스 학장은 그의 스승에게 받았다고 한다. 펜이 ‘능력의 상징’으로 자신과 같이 훌륭한 학생을 만나면 주라고 했지만, 지난 32년간 그럴 자격이 있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렇게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려고 펜을 보여주었는데, 란초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묻는다.
“지구 밖에서 펜을 못 쓰면 연필을 쓰면 되잖아요? 그럼 연구비를 안 써도 됐을 텐데요.”
뜻밖의 반문에 바이러스 학장이 다음에 알려주겠다면서 얼버무리며 자리를 마무리한다. 영화에서는 무한경쟁을 강조하는 공과대학과 학장의 꽉 막힌 융통성 없는 속성과 란초의 유연함과 서슴없이 질문을 던지는 자유분방함을 대비해 보여주는 소품으로 쓰였다. 영화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 일화는 꽤 알려져 있었고, 자기계발이나 창의성을 강조하는 강연에서 곧잘 등장하곤 했다. 2008년에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2020년에 번역되어 나온 <탁월한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팀 허슨 지음, 강유리 옮김, 현대지성 펴냄, 2020)에서도 ‘스페이스 펜(space pen)’이란 제품명으로 제법 자세하게 다음과 같은 차례로 소개되며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무중력 상태에서는 펜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사실 발견
- 기계학, 화학, 유체역학 전문가로 팀 구성, 수백만 달러 예산 쓰며 ‘스페이스 펜’ 개발
- 당시 미국의 경쟁자인 소련(소비에트 연방)도 비슷한 문제 봉착
- 우주인들에게 ‘연필’을 지급하여 저렴하고 효과적으로 문제 해결
- “어떻게 하면 무중력 상태에서 쓸 수 있는 펜을 만들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무중력 상태에서 글씨를 쓸 수 있을까?”라고 근본적인 단순한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기업에서도 빈번
30년 전쯤에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미국이 도저히 해결책을 찾지 못해서 소련을 염탐하니 연필을 쓰더라고 했다. 이런 일화야 전달되면서 변형이 되곤 한다. 팀 허슨의 책에서도 그러려니 하면서 좀 식상한 소재이다 싶었는데, 이 소재의 끝에 주석이 달려 있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나는 스페이스 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스놉스닷컴(Snopes.com)에 따르면 이 펜은 폴 피셔라는 사람이 개발한 후 미 항공우주국에 적정한 가격으로 공급했다고 한다.’
이 유명한 일화가 사실이 아니라니 반전이다. 워낙 페이크 뉴스들이 많은 요즘이니 큰 반전이랄 것도 없긴 하다. 그런데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에 소개한 이유를 저자가 밝힌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둔 이유는 마치 이솝 이야기처럼 더 큰 진리를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략) 잘못된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큰 대가가 따를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주고자 이 ’전설‘을 사용하는 것을 독자들도 너그러이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사실을 제대로 알려줌으로써 더한 효과를 거두는 큰 반전을 불러일으켰다. 때로 반전은 솔직하게 오류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양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다. 아참, <세 얼간이> 예기로 시작했으니 그걸로 끝을 맺자. 바이러스 학장은 나중에 울면서 란초에게 그가 30년 넘게 가지고 있던 스페이스 펜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