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디지털 시대의 풍향계

[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디지털 시대의 풍향계

  • 김시래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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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픽사베이
출처 픽사베이

몇 해 전 농심기획의 대표직에서 물러나 아름다운 협곡의 도시 론다를 여행했다. 헤밍웨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고 극찬을 한 그곳이다. 누에보 다리에서 바라본 절벽의 하얀 집들은 평화로왔다. 그러나 유럽의 고풍스런 마을들은 하나같이 중세의 슬프고 암울한 역사를 품고 있다. 론다의 입구엔 전설적인 투우사 프란시스코 로메로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투우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시작되어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전국으로 퍼져나가 봄부터 11월까지 일요일만 되면 마드리드, 세비야 등에서 열렸다. 플라멩코와 함께 스페인을 대표 문화로 자리잡은 투우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있다. 황소와 대결할 때 로메로가 흔든 붉은색 천, 뮬레따(muleta)에 관한 것이다. 흔히 투우가 날뛰는 것은 이 천의 붉은색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는 색맹이다. 소가 흥분하는 것은 관객의 함성과 천의 움직임 때문이다. 미동도 없이 소를 노려보던 투우사가 천을 흔들어대면 황소는 흥분하기 시작한다. 소가 돌진하며 달려올 때 당황해서 움직이거나 버둥대면 그의 분노를 부채질해서 뿔에 받히는 빌미가 된다. 로메로는 일체의 미동도 없이 소를 바라보다 천천히 천을 흔들어 소를 유인했을 것이다. 그리곤 플라멩코를 추는 댄서와도 같이 절제된 호흡과 동작으로 지친 소의 어깨와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로메로는 17세에 데뷔해서 소 5,600마리를 해치우고 45세에 은퇴했다. 스페인 영웅의 동상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바라보다 불현듯 광고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 떠올랐다. 낚시를 하려면 물고기가 되고 훌륭한 투우사가 되려면 소가 되라는 말이다. 문득 소의 입장이 돼보기로 했다. 자, 그의 손에 일년에 200백 마리의 동족이 비참하게 죽어나갔다. 그렇다면 로메로는 민족의 철천지원수다. 관광객의 사정을 볼 것도 없이 폭탄이라도 던져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 아름다운 누에보 다리 위로 피를 흘리며 헐떡거리다 숨을 거둔 검은 황소들의 비참한 환영이 떠올랐다. 모든 사태는 다양한 관점을 함의한다.  

프란시스코 로메로 (출처 wikimedia commons)
프란시스코 로메로 (출처 wikimedia commons)

정보와 지식은 널려있다. 당신을 지탱해 줄 무기는 무엇인가? 말을 타고 돌진해서 여포와 겨루고 안량의 목을 거둔 관우의 무기는 긴 자루 끝에 반달 모양의 칼을 매단 82근의 청룡언월도다. 추풍낙엽처럼 적의 수급을 거둔 장비의 무기는 달랐다. 구불구불 뱀의 형상을 한 장팔사모창이였다. 비즈니스맨의 무기는 새로운 관점이다. 고정된 것이 없는 가속도의 세상에 정답은 없다. 가까운 답만이 있을 뿐이다.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꺼내 쓰겠다는 열린 자세가 중요하다. 승패는 유연성에 달려있는 것이다.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여기저기서 인생백세시대를 알렸다. 환갑잔치라는 말이 무색해지고 두 분의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가 나온다고 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무색했다. 긴 호흡으로 인생을 준비하는 태도가 필요했다. 삼성생명의 "긴 인생 아름답도록"이란 광고 카피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수명이 늘어난다고 인생의 유한성이 바뀔 것인가.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되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이다. "오늘이 인생이다"라는 한화생명의 광고 슬로건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사람에 따라 인생은 긴 것일 수도 오늘 하루일 수도 있는 것이다. 농림수산식품교육정보원의 쌀소비 진작 캠페인의 카피도 트렌드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관점을 활용했다. 혼밥하면 혼자 살아가는 사람의 쓸쓸한 식탁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래선 사람들의 차별화된 공감을 끌어낼 수 없다. 다시 생각했다. 뒤섞여 살기 싫어하는 개인주의 세태다. 스마트폰은 언제든 시간을 함께 보낼 파트너이고 친절한 요리법의 전수자다. 그렇다면 혼자 준비해서 차려 먹는 한 끼 밥은 그야말로 자신을 위한 선물이 된다. 혼밥을 "혼을 다해 지은 밥"이란 카피는 그렇게 재해석됐다. 시대를 관통하는 바람 속엔 늘 다양한 풍향계가 존재한다. 한 시대의 사조를 열어젖힌 예술가들은 이 방면의 대가들이다. 비만의 여인을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시킨 콜롬비아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는 투우 그림도 자주 그렸다. 그는 투우사 양성학교를 다녔다. 그가 선택한 대상은 주목받지 못했거나 원초적 용기를 지닌 자였다. 그래서 소의 목숨을 끊어 대미를 장식하며 관객의 환호를 받는 마타도르(Matador)보다 가장 먼저 등장해서 사투를 벌여 소의 항복을 받아내는 피카도르(Picador)를 많이 그렸다. 피에로 만초니라는 미술가는 자신의 똥을 담아 캔에 넣고 "예술가의 똥"이라는 이름의 작품을 실제로 팔았다. 불상이 놓여 있을 자리를 뒤집어놓고 세계를 들어 올렸다며 "세계의 대좌" 라는 이름을 붙인 작품도 그의 것이다. 다양한 관점을 인정해야 색다른 관점을 발견한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닫힌 것은 오직 당신의 마음뿐이다.

만초니의 "세계의 대좌"
만초니의 "세계의 대좌"

 


김시래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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