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연상력의 급수

[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연상력의 급수

  • 김시래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2.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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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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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가려면 물러서는 법을 알아야 해". 3호선 녹번역 승강장 안전문에 쓰여있는 ‘그네’라는 시다. 발끝에 힘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앞으로 힘차게 구르면 허공에 높이 솟아올라 바람을 갈랐다. 그 문장은 힘겹게 코로나를 건너가는 우리네 자화상과 겹쳐졌다. 이번엔 오미크론이란다. 섬멸됐다고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끈질기게 추격해오는 적들이 몰려드는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 같다. 지금의 환란이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아 지구촌에 든든한 방어막을 두르는 계기가 될 것이란 희망의 메시지로 읽혔다. 사물의 의미는 때와 장소에 따라 맥락이 달라진다. 물론 여기에도 수준이 있고 급수가 있다. 

사과가 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먹고 싶어 침이 고인다고? 아침에 먹어야 황금사과라는데? 저녁에 먹으면 속이 쓰려 소화에 안좋단다. 부녀회에 모인 회원들의 사과다. '누구나'의 사과다. 화가의 사과는 어떤 것일까? 세잔느가 그린 사과는 원근의 소실점이 없다. 그는 전체적인 입장에서 대상을 묘사하지 않았다. 위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밑에서 본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담았다. 사과 하나 하나의 모습에 주목한 것이다. 그의 화법은 피카소의 큐비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세잔느의 사과는 개별성의 사과다. 존엄성의 사과다. 식물학자에게 사과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물과 비료를 주고 공기를 살펴 사과의 성장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토양과 기후의 조건이 사과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따질 것이다. 식물학자의 사과는 생명과 성장의 사과다. 일본 아오모리현 농부의 사과는 또 다른 사과다. 어느 한 해 태풍이 들어 열 개 중에 아홉 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퇴비로 썼을까? 이웃에게 나눠줬을까? 그 농부는 발상력이 뛰어났다. 떨어지지 않은 사과를 보고 시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매달린 사과에 '합격사과'라고 이름을 붙여 손해를 만회했다. 농부의 사과는 관점의 사과다. 생존의 사과다. 자, 여기 충주 사과와 홍성 사과가 있다. 맛도 비슷하고 크기도 비슷하고 가격도 비슷하다. 당신이라면 어떤 사과를 고르겠는가? 유심히 살펴보라. 시식 코너에서 공짜로 주는 사과를 고른다. 조건이 비슷하면 먹어 본 사과를 선택한다. 이 사과는 주부의 지갑을 노리는 사과다. 광고인의 사과다. 여기에 시대의 시선을 담아내면 연상력의 급수가 달자진다. 

지긋지긋한 마스크를 보자. 원래 추운 겨울 보온용이나 감기 예방용이다. 중국에서 황사가 몰려오더니 먼지를 막는 수단이 되었다. 독일의 한 치과의사는 마스크에 혓바닥을 그려 넣었다. 이를 뽑는 아이의 공포를 막는 아이디어다. 코로나 시대엔 세균을 차단해서 목숨을 지켜주는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KF94는 차단력의 마스크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끈 없는 마스크나 외모를 감안한 연예인 마스크도 있다. 입 냄새를 막기 위해 향기를 코팅한 마스크도, 초등학교 학생들의 얼굴 파악이 안되어 마스크밖에 학생의 이름을 표기할 마스크도 나왔다. 비즈니스맨의 연상력은 70억의 인구만큼이나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먼지처럼 쌓여있는 선입견(先入見)과 돌처럼 굳어진 고정관념(固定觀念)에서 벗어나야한다.

 


김시래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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