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줄리언 반스의 천국을 실현한 한국 신문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줄리언 반스의 천국을 실현한 한국 신문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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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신문을 읽을 때 신문지의 잉크가 묻어 나와 손을 더럽히는 일도 없었고, 기사가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는 일도 없었다. 아이들은 또다시 순수해졌으며, 남녀는 서로에게 친절하고, 아무도 이빨을 때울 필요가 없고, 여자들의 스타킹에 올이 풀리는 일도 없어졌단다.

줄리언 반스가 소설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에서 천국은 이런 것이라며 상상한 모습들이다. 제목처럼 짧게 우화나 에세이처럼 요약한 세계 역사를 적은 후,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기대, 또는 이런 상황 따위는 있을 수 없다며 마지막 장에 적어 놓았다. 반스가 이 소설을 썼던 1980년대 말의 세상 모습들에 기초하여 위의 상황들을 끄집어낸 건 확실하다. 얼마큼 조목조목이 반스가 원한대로 변했고, 우리의 세상은 천국에 얼마나 가까워진 것일까?

여자 스타킹 관련 기사와 상품을 검색하니, 풀어질 혹은 풀어진 ‘올’에 관련된 문구들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올 안 나가는’이란 문구가 상품의 장점으로 자주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올이 안 나가게 스타킹 관리하는 법이라든지, 올이 나갔을 때의 대처법을 알려준다. 그만큼 아직도 여자 스타킹의 올은 계속 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가 가기 전에 치료하기 위하여 치과 예약을 했다. 여전히 예약 시간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치과 환자들은 많았다. 임플란트 치료법이 발전하면서 ‘이빨을 때울 필요’는 줄어들었을지 모르지만, 치과 공사는 더 커지고 잦아졌다. 반스의 소설을 원문으로 읽지 않아서 ‘이빨’이 어떤 영어 단어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치과 의사가 ‘이빨’은 동물의 경우에 쓰는 말이고, 사람은 ‘치아’라고 해야 한다고 힘주어 한 말이 생각났다. 어쨌든 치과 의사에게 때울 치아들은 아직도 줄을 서 있다.

아이들이 예전만큼 순수하지 않다는 불평은 호모사피엔스가 존재한 이래 계속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측정할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똑똑함은 어른들에게는 반비례 상태로 진행된다. 어른들이 원하는 것인 양 묘사하는 순수함에 아이들이 도달하면 아마도 그 어른들은 교육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여, 갈수록 아이들이 어리석어진다고 불평할 것이다. 친절함에 대한 반스의 묘사는 21세기의 젠더 다양성 시각으로는 남녀 양성(兩性) 간의 문제로 국한했다고 구설에 오를 공산이 크다. 게다가 ‘서로 간에 친절’이라고 하면, 기존 관념에 기초하여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문이 최초 출현했을 때부터, 그 기사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그래도 예전에는 사리 관계를 먼저 따져서, 거짓 기사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사람들 마음에 가하는 타격보다 훨씬 커서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이제는 대놓고 가짜 뉴스를 양산하며, 그걸 ‘post-truth’, ‘탈진실’이라고 하면서 그림자를 드리우는 정도를 넘어서 멀쩡한 사람을 짓이겨 버린다. 반스가 저 글을 쓸 때와 비교하면, 신문은 매출과 영향력, 진실도 등에서 암흑세계에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반스가 그린 천국의 모습으로 이 땅에 유일하게 실현된 건 신문의 잉크이다. 예전에는 신문을 펼치면 손에 검은색 잉크가 묻어 나왔다. 한국은 좀 덜한 편이었지만 외국의 어떤 신문에서는 잉크가 마르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손가락 끝에 묻은 잉크로 주민등록 만들 때의 지문을 찍어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의 신문들이 심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손이 좀 더러워졌다’라고 투덜거릴 수준인데, 미국의 신문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보면 마치 혈서를 쓰듯이 잉크로 글씨를 쓸 수도 있었다. 더욱이 휘발유 냄새가 진하게 나곤 했다. 불쏘시개로 쓰기에 좋게 만들었던 것일까.

1996년 7월 12일 조선일보는 ‘손에 검정이 묻어나지 않는’ 콩기름 잉크로 신문을 인쇄했다고 1면 사고(社告)로 밝혔다. 식물성이라 대기 오염 배출량도 적고, 신문지 재활용도 훨씬 쉽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몇 차례의 반전이 있었다. 원래 조선일보가 7월 11일에 ‘15일부터 콩기름 잉크로 신문을 찍습니다’고 그날 첫판으로 나온 신문인 소위 가판(街版)에 밝혔더니, 중앙일보에서 원래 기사를 빼고는 이틀 빠른 13일부터 자신들은 콩기름 잉크로 신문을 발행한다고 했다. 그러자 조선일보에서 기습적으로 12일 자 신문을 콩기름 잉크로 찍은, 나름 그들 세계의 치열한 반전에 반전의 드라마가 있었다.

이 싸움에서 빠져 있던 동아일보는 13일 자 사회면에 ‘때아닌 콩기름 잉크 논란’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내어, 콩기름은 공해를 배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박했다. 그리고 미국 콩을 원료로 한 콩기름을 수입함으로써 미국 곡물 업자에게나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한 일반 독자는 “콩기름 잉크 사용을 과대 선전하기보다는 포장도 뜯지 않고 폐기되는 신문이 없도록 발행 부수를 양심적으로 조정해 자원 낭비를 줄이는 게 환경보호의 급선무”라며 정곡을 찔렀다. 1996년 그 시절에 이미 폐기되는 신문이 많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지금은 바로 폐지로 수출이 된다고 하니 차라리 나아진 것인가.

줄리언 반스에게 그가 꿈꾼 천국 모습의 일부인 손에 잉크가 묻어 나오지 않는 신문은 한국에서 일찌감치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그 과정에서의 엎치락뒤치락 반전은 노 작가의 창작 열정을 자극할 수도 있겠다.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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